서울에 두고 온 것들
20살부터 시작된 서울 생활은 16년을 꽉 채우고 남해로 이사 가며 마무리되었다. 집만 이사 가면 영영 서울을 떠나게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서울에 두고 옮겨오지 못한 게 많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의, 식, 주가 필요하다고 하지 않던가. 바꾸어 말하면 내가 오랜 기간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서울에는 나의 단골 옷가게, 단골 식당, 사는 집과 일하는 직장, 동거인, 단골 병원, 친한 친구들과 기타 등등이 있었다는 뜻이다.
13년간 같이 살았던 룸메이트는 다른 룸메이트와 함께 살기로 하여 좋은 타이밍과 관계로 동거 생활을 정리했다. <지속 가능한 비혼 동거 라이프>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종종 연락을 주고받으며 괴로웠던 일상이나 즐거운 소식들을 전한다. 이 친구가 하필 이사 간 집이 남부터미널에서 멀지 않다. 남해에서 서울로 가는 유일한 시외버스에서 하차하는 곳이다. 남해에서 인터뷰한 누군가는 남부터미널 근처에 별장(원룸)을 갖고 싶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이 친구의 집이 누군가가 꿈에 그리던 별장이 된 셈이다. 룸메이트는 바빠서 아직 와보지 못했지만 친했던 친구들은 남해에 한 번씩 놀러 왔다. 이들에게는 나의 집이 별장인 셈이다. 그래도 멀리까지 와준 친구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 친구들이 그리운 날들도 있지만, 남해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또 새롭고 즐겁다.
남해 생활에서는 생각보다 다양한 옷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가져온 옷만으로도 10년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여름에는 습도가 높으니 기능성 티셔츠를 즐겨 입고, 업무 상 미팅에는 그 위에 셔츠를 겹쳐 입는다. 바지도 잘 닳지 않는 소재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거의 매일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하면서 선택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라 일상에서 선택하는 일을 줄이고 싶어 같은 옷을 여러 벌 사서 그렇다. 대신 택배로 주문하는 러닝 용품이 많아졌다. 운동화나 선글라스, 러닝조끼가 그것이다. 남해는 정말 달리기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단골 옷가게는 더 이상 이용하지 않게 되었다.
미용실은 여러 번 옮겼었다. 머리를 짧게 자른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 그건 매달 미용실에 간 지 그만큼 되었다는 뜻이다. 가장 마지막으로 가던 곳은 학교 내에 있던 구내 이발소였다. 나의 주식이었던 천원학식을 먹을 수 있는 학생회관 지하에 있는 곳으로, 단돈 8천 원에 머리를 자를 수 있었다. 아주 과묵한 이발사 분이라 더 맘에 들었었다. 졸업할 때 즈음 9천 원으로 값이 올랐다.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원생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었다. 교수님들이나 외국인 학생들도 자주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신 샴푸는 셀프였는데, 내가 편한 방식으로 머리를 감고 말릴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남해에 와서 적당한 미용실을 모색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어 머리를 못 자르고 있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마음에 군청 앞 이발소에 들어갔다. 두어 번 머리를 맡겼으나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결국 잠시 서울에 가는 길에 단골 미용실에 다시 들러 머리를 잘랐다. 아, 이 이발사 분을 남해로 모셔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사실 제일 아쉬운 점은 다름 아닌 의료다. 서른 중반이 되니 ‘지병’이라고 부를만한 게 몇 가지 생겼다. 눈에는 때 이른 녹내장이 찾아왔고, 갑상선에는 가족력이 있어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치아는 별 이상은 없으나 이리저리 땜질한 게 많아 6개월, 1년에 한 번씩 찾아가 정기검진을 받고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탓에 근골격계도 한 번씩 이상이 생겨 정형외과나 한의원을 찾곤 했다.
남해군 내에는 안과가 단 한 군데 있다. 3개월마다 안과 때문에 서울에 갈 수는 없으니 안과를 옮겨와 보겠다는 생각으로 서울 병원의 차트를 복사해 왔다. 어르신이 가득한 대기실에서 한참을 기다려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차트를 유심히 보시더니 시야 검사기계가 없어 녹내장을 전문적으로 보는 큰 병원에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검사는 해보고 싶다고 했다. 장시간 일했더니 눈이 왠지 더 침침해진 것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 병원에 있는 장비로 가능한 검사들을 했는데, 결과를 본 의사 선생님은 기계마다 오차가 있어서 더 악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진료비도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지방 의료의 현실이 피부에 와닿은 순간이었다. 이 날 원래 치과도 가려고 했는데 그냥 깔끔하게 포기하고 6개월에 한 번씩 서울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단골 안과, 치과, 내과는 남해로 이사 오는 데 실패했다.
대신 근골격계 질환은 아주 저렴한 가격에 치료를 받고 있다. 종종 달리기를 오래 하거나, 운전을 오래 해서 근육이 당기고 아픈 경우가 있다. 내가 있는 상주면에는 한의원이 없다. 대신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상주보건지소에 한의사가 있다. 보통 보건소에는 의사만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시골 보건지소에는 한의사까지 있다니! 한의사가 있다는 사실도 몇 달 전 마을회관에 팥죽을 얻어먹으러 갔다가 왕진 온 한의사와 겸상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곳에 공보의로 오는 한의사들은 보통 한의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대체하기 위해 온 의사들이다. 아무래도 최근에 졸업했다 보니 최신 한의학을 접하여 침을 아주 잘 놓아주신다. 서울로 왕복운전을 하느라 뭉친 근육이 침치료 한 번에 싹 나았다. 치료비도 단돈 1,100원이다. 65세 이상 어르신은 무료란다. 복지의 달콤함을 이런 데에서 맛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