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말은 이주민의 언어
이제 남해로 내려온 지 6개월이 되었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을 남해에서 지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다. 석사논문을 쓰려고 인터뷰를 하던 중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가 "한 달만 지내려고 내려왔는데 한 달만 더, 한 달만 더 하다 보니 벌써 몇 년이 흘러버렸다" 였는데, 나에게도 그런 시간의 흐름이 찾아온 것 같다.
안양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자라고 스물부터 서울에서 지냈다. 서울에서는 인천에서 왔다고 했는데 남해에 와서 나의 출처를 밝히려고 구구절절 이야기하니 그 정도면 서울 사람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서울에서 왔다고 한다. 주변에 부산에서 온 친구, 마산에서 온 친구, 남해가 고향인 친구 등 경남 지역 친구들이 많지만 아무래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온 친구들이 많다 보니 하루의 대부분은 '서울말'을 들으며 지낸다.
그렇지만 현장에 나가거나 마을 어르신들과 만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근에 군청에서 귀어인을 위한 빈집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맡아 시작했다. 대개 빈집이 있는 마을은 청년들이 많지 않은 편이라, 못 보던 젊은 여성 청년이 나타나면 으레 어르신들이 신기하게, 혹은 수상쩍게 쳐다보시곤 한다. 그러다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드리면 대개는 활짝 웃으며 마주 보아주시고, 또 더러는 여기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신다. 그러면 여차저차 빈집 리모델링을 하려는데 실측을 하러 왔다고 소개를 하곤 한다.
처음에 실측을 하러 갔을 때는 혼자 갔다. 집안을 구석구석 다니며 빈 종이에 도면을 그리고 일일이 치수를 재어 적어야 하기 때문에 한 집 당 4시간 정도 걸린다. 그러고도 빠진 치수가 있어 도면에 표기해 두었다가 다시 재러 갈 날을 기다렸다. 마침 날씨도 좋고, 도면을 완성해야 할 날은 다가오기에 친구 둘을 불러 함께 가기로 했다. 역시나 지난번처럼 마을 입구 평상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이 쳐다보시기에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한참 실측을 하던 와중에 담 너머에서 앞 집 아저씨가 말씀을 거시는 게 아닌가. 몇 살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물어보시는데 같이 와 있던 부산에서 온 친구가 대답을 거들었다.
그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이제 남해 말에 제법 귀가 트였다고 생각했는데, 도로 들리지 않게 되었다. 경상도 말씨를 들은 아저씨의 말이 빨라졌다. 내가 듣기로는 의미가 뭉쳐서 빠르게 흘러간 뭉개진 말인데, 친구는 어찌 된 일인지 맑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아저씨가 가시고 나서 내가 이해하지 못한 몇 마디의 내용을 물어보았는데 들은 음절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그런데 의미는 또 단순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제야 깨달았다. 내 귀가 트인 것이 아니라, 이들이 나에게 맞춰서 0.8배속의 배려를 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남해 곳곳에는 '어서오시다'라는 표지판이 있는데, 이는 남해 특유의 어미 처리다. 원래는 존댓말이었는데 남해에서는 사투리가 되었다나. 남해가 섬이라 그런지 말씨가 부산과도 같지 않고 대구나 마산과도 같지 않다.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억양이니 단어라도 따라 해보는데, 가끔 서울 친구들과 흉내 내어 보는 것이 바로 저 '~시다'이다. '~시다'로 끝나는 말은 '~세요'로 바꾸면 의미를 아는 것이 어렵지 않다. 생각보다 저 어미의 활용범위가 굉장히 광범위하여 새로운 변형을 들으면 눈이 번쩍 뜨인다. 어서오시다, 잘 가시다, 어서 앉으시다, 모이시다, 잠깐 계시다, 앉으시다, 서시다, 시다, 시다... 오, 이 말을 이렇게 쓴다고? 재밌는데?
6월 초에는 때 이른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3월 즈음에 드디어 전입신고를 마쳤기에, 어엿한 상주면민으로 사전투표가 아닌 본투표를 하러 갔다. 아침 일찍 갔는데도 투표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님들이 계셔서 투표용지를 받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기다리는 동안 안내원들의 말을 듣는데, 내 바로 앞 할머니께는 "도장 찍고 접어가지고예 저기다 여으시다" 하셨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자 "안녕하세요"하고 다가가니 "도장 찍어서 반 접고 저기 넣으세요" 하시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여기 사람 아닌 티를 내고 다니나 보다. 이렇게 하루하루 따뜻한 배려와 관심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