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이 필요해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아침에 사진관에 출근한 희수 씨가 문 앞에 놓인 박카스 한 상자를 발견하고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박카스 상자 겉면에는 견출지가 붙어있었고, 견출지에는 훌륭하다곤 말할 수 없는 필체로 이런 문구가 쓰여있었다. "선한 영향력 항상 좋은 기운 받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
처음에는 그냥 희수 씨의 평소 행실을 보고 감명 깊은 누군가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희수 씨는 워낙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친구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박카스 나눔이 연쇄적이었다는 것이다. 박카스는 카페 키읔 앞에서도, 바래온 앞에서도, 급기야는 동네수육 앞에서도 발견됐다.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서는 난리가 났다. 남해가 아무리 콘텐츠가 많다지만, 이번만큼 도파민이 터지는 일은 없었다. 대체 범인(?)은 누굴까?
오후가 되자 추측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단서 1 : 이모티콘 ^.^을 쓴다. 근데 또 ^은 한글 ㅅ으로 써놨다.
단서 2 : 남자 글씨체 같다.
단서 3 : 누군가는 받고 누군가는 받지 않았다. 즉, 우리를 아는 사람이지만 이너서클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일단 산토건축에는 박카스가 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도 범인(?)으로 의심받았다. 일단 제 필체랑 너무 다르고요, 저는 새벽에는 자고 있었어요...라고 항변을 해본다. 근데 이거 너무 재밌잖아? 일단은 누군지 모른다는 것에서 흥미롭고, 한 명에게만 준 게 아니라 여기저기 주고 다녔다는 것, 쪽지를 남겼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정체는 철저히 숨겼다는 것... 모두가 잠든 새벽에, 이렇게 박카스를 뿌리고 다닌 사람이 누굴까??
후보에 올랐던 몇 명의 친구들은 "그 사람은 이럴 에너지가 없다"라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당하고...
점심시간에 흙기와에 잠깐 주문한 책을 받으러 가서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사장님도 탐정놀이에 합류했다. 곧이어 놀러 온 대학 교수님과 소장님도 추측을 이어갔다.
단서 4 : 말투를 보니 경상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귀촌한 사람일 수도?
단서 5 : 견출지를 쓴 걸 보니 젊은 사람은 아니다.
단서 6 : 음료가 비타500도, 미에로화이바도 아닌 박카스인 걸 봐도 젊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모두에게 도파민이 가득한 오전이 지나가고...
전문적인 장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CCTV. 범인(?)은 의외로 철두철미했다. 새벽 세시 반쯤 가게 앞에 도착했다. 포터를 타고 왔는데, 운전석에는 누군가 한 명이 더 타고 있다. 즉, 2인조다. CCTV 위치를 파악하고 핸드폰 플래시로 얼굴을 가리고 왔다. 박카스를 놓은 다음에는 사진을 찍었다.
단서 7 : CCTV로 본 결과, 범인(?)은 남자다.
단서 8 : 견출지에는 인스타를 잘 보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즉, 인스타 팔로워다.
확대한 얼굴을 보니 우리가 추측한 사람 중에 누구도 닮지 않은 사람이다. 이너서클에 있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는 단서에 부합한다. 흙기와 사장님은 박카스를 받은 가게들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대조해서 누군가를 찾아냈다. 찾아낸 사람은 놀랍게도 박카스를 받은 모두와 인스타그램 맞팔 상태였고, 남해 토박이였으며, 40~50대 정도의 연령대였다. 무엇보다 CCTV 속 인물과 얼굴과 헤어스타일이 닮았다.
과연 이 분이 범인(?)일까? 아마 맞는 것 같다. 희수 씨는 나중에 밥 사드려야겠다며 신이 났다.
남해의 봄날에 마음까지 따스해지고 도파민도 돌고 두근두근한 하루를 다 보내고 나니 역시 남해에 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까지 재미있는 콘텐츠가 많은 곳일 줄이야!
+) 후속이야기
유김밥에도, 때깔로무역에도 박카스 그분이 다녀갔다고 한다. 아마 인스타그램에 안 올리셨거나 내가 팔로우하지 않은 분들 중에도 또 받으신 분이 있을 것 같고. 족히 10명은 박카스 천사가 다녀간 것 같다.
글도 올리고, 다들 누가 두고 갔는지 찾으니 희수 씨에게 연락이 왔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흙기와 사장님의 추측은 틀렸다.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아직 정체는 공개되지 않았다. 아직 누군지 모르는 그가 희수 씨에게 보낸 카톡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남해에 사는 거 너~무 재밌다!!
응원합니다, 대박나세요 천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