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소거 - 무음 공해
그는 이명에 오늘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귓가를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다가 눈을 꼭 감은 채 숫자를 세기로 하였다. 약을 처방해 주는 의사도 그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잠에 들기 어려울 때에는 약을 먹기 전에 한번 숫자를 세어 보라고. 그래서 그는 먼저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닫는 것만으로도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온다. 그러나 하나를 세자 눈꺼풀 안쪽에서 아침이 찾아오는 것 같다.
둘, 셋, 넷, 다섯…
숫자가 여섯을 넘어가자 어떤 풍경이 소리와 함께 떠오른다.
아버지가 잡아준 잠자리의 날개를 놓쳤을 때, 손바닥으로 듣던 힘찬 날갯짓의 공명음과, 거미줄처럼 늘어진 전선으로 땋아 올린 전신주에 노란 불이 켜질 때쯤, 집에서 부르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어렵지 않게 숫자를 세어 나갔다.
숫자가 스물셋이 넘어가자 이명은 폭죽처럼 터지며 새로운 폭발음으로 전환된다.
훈련소에서 당기던 총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소리가 연속하여 귀를 때리고 있다. 그는 종이를 말아 접은 귀마개를 떨어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참호 위로 총알이 빗발치는 공간에서 총탄 모양으로 말린 귀마개를 끼는 것은 오히려 자살 행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발의 총알이 양귀를 뚫고 동시에 내 머리를 터뜨리려 달려들 것 같았다. 며칠째 지속된 굉음의 후유증으로 그의 귓가에서는 계속 고주파음이 들리는 것 같다. 심정지 환자의 모니터링 장비라면 분명 전문의가 뛰어왔을 소리였지만, 전쟁터에서의 의료행위는 고장난 부품을 고쳐 다시 시장에 출품하는 A/S 서비스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끝없는 소리. 총성과 포성, 굉음과 섬광.
아직도 숫자는 스물넷을 넘어가지 못한다.
지뢰밭을 앞장서서 돌파하다가 상반신만 남은 소대장을 대신하여, 소리치던 중대장은 참호에서 일어서자마자 소리와 빛에 삼켜져, 하반신만 남았다. 장 병장은 아직도 참호 안에서 잔뜩 웅크린 채로 고개를 숙이며 되뇌고 있다. ‘누군가 앞장서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병신같이 굴지 말라고.’
숫자를 세는 것을 잊어버린다.
중대장이, 아니 그의 상반신이 사라지고 난 야밤에 장 병장은 몇몇의 무리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그는 내게 함께 갈 것을 권유했으나 나는 잔뜩 얼어붙어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병신 같은 놈이라고 했다.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하는 참호 속의 부상자들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몇몇 병사들과 함께 나는 밤새 귀를 쫑긋 열어두었다가 기절하듯 잠든다. 시야가 흐려지며 절벽으로 떨어지는 듯한 와중에 등 뒤에서 아군의 포성이 들리는 듯했다. 화약이 터지는 소리에 이명이 다시 기계음처럼 도진다.
한껏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이명을 방해하여 눈이 겨우 떠졌다. 주변은 어두운 밤이다. 총격이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우리 모두는 부상병들과 다를 바 없었다.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주위를 둘러보니 검은 실루엣이 한껏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나는 기겁하여 채 조준하지도 못한 채 방아쇠를 당긴다. 소총에서 파열음이 나며 또다시 이명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곧이어 중대장의 남은 하반신보다도 작을 것 같은 인민군이 쓰러져 참호로 굴러들어 온다. 꿈틀대는 녀석의 군패를 찾으려 떨리는 손으로 인민복을 찢어발기자 봉창에서 안전핀을 뽑지 못한 수류탄이 굴러 떨어진다. 콧수염 한번 민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열여섯이나 스무 살 정도로 보인다. 녀석이 반굴인지 관창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도 잠에 들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이명이 다시 그를 괴롭힌다. 그제야 그는 스물여섯을 셀 수 있었다.
길게 늘어지는 행군 도중, 전례 없이 가까운 곳에서 터진 폭발음에 하늘과 땅이 시계방향으로 반 바퀴 돌아간다. 내 시계도 반 바퀴 돌아간 후에야 정신이 든다. 오른쪽 다리를 움직일 수 없다. 소대장과 중대장보다는 나았다. 나는 내 몸의 절반 이상을 남겼고, 양산으로 후송될 수 있었으니까. 며칠간 재활 훈련을 마친 뒤, 부목을 짚고 병원을 나선다. 도처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사투리가 퍼져있고, 높낮이가 두드러지는 목소리가 시끄럽게 주변을 가득 채운다.
스물일곱을 세는 것은 쉬웠다.
내가 남부 지역의 사투리에 익숙해질 때 즈음에 산으로 도망간 장 병장의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그들은 소총으로 무장한 화적단이 되어 강원도 일대의 민가를 털어먹으며 숨어 살아가다 양산 지방에서 붙잡혔다고 했다. 그들은 마주한 군경들에게 소총을 버리고 투항했으나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당했다고 한다. 장 병장 말대로 나는 병신이 되었지만 그는 까맣게 탄 시체가 되었다.
갑작스레 숫자가 여든아홉을 순식간에 넘긴다. 깜박 잠들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 센 숫자는 분명 여든아홉이다.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의족을 절뚝이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창 밖에는 백색 가로등이 일렁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입은 주인의 시선이 빼앗긴 틈에 계속해서 숫자를 세고 있다.
몇 번이나 제기한 가로등 철거 민원에도 결과는 묵묵부답이었다.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복지관의 직원들의 발길이 뜸해지는 것도 느껴졌다. 어느 날인가부터는 주민센터를 방문하는 것조차 벅차다. 세월이 조금씩 흘러가고 그가 이명에 시달릴 때마다 — 그의 집에 물이 새어 수리를 요청할 때나(쉰다섯), 나라에서 매달 쥐어주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점점 적어질 때나(일흔둘), 이미 집 앞에 높다랗게 세워진 아파트가 해를 가리면서 저 밝은 가로등이 은행나무처럼 심겼을 때(여든) — 이를 항변이라도 해보려 하면, 그럴 때마다 새까맣게 탄 장 병장은 속삭인다.
‘누군가 앞장서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란 말이야.’
백내장 때문인지 도시의 광공해 때문인지 밤에도 그의 눈은 흰 빛으로 가득 차있다. 떨리는 손길로 창문을 밀자 오래된 금속 창틀의 마찰음이 아직도 그를 짓누르는 이명을 피해서 고막을 어루만진다.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직도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또 다른 시대의 젊음들과 함께 형형색색으로 흐릿하게 춤추고 있다. 잠에 들려면 다시 숫자를 세어야 하지만 오늘은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밤을 새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