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실

바늘과실

by 일요일의 조작가

동훈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리모컨을 발등에 떨어뜨린 뒤 발을 부여잡은 채 동동 뛰었다. 그러나 화면에서 담담하게 기준금리 인상을 브리핑하는 저 늙은이의 입을 먼저 꿰매 버리고 싶었다. 약삭빠른 은행은 곧 여신이자를 올릴 것이고 그의 어깨에는 짐덩어리가 하나 더 얹어질 것이다. 작년의 투자 성공으로 당당하게 퇴사한 것이 실수였나 싶었다. 그때 푼돈이라 여겼던 마약 같은 월급이 다시 그리웠다.


다시 직장을 구해보기로 마음먹은 후 동훈은 옷장을 뒤져 주인을 잘못 따라온 정장을 찾아내 어깨 위에 허옇게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냈다. 전 직장 송별회에서 얻은 정장 바지 아래의 트임이 눈에 띄었다. 취해서 뭘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마도 팀원들과 간 노래방에서 격하게 춤을 추다가 뜯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앞날에 더 이상 회사는 없을 것이라 기대하며 방치해 뒀던 것 같았다. 흰 와이셔츠에는 작년에 묻은 뻘건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잘못 배운 젓가락질 때문에 집던 음식을 자주 놓쳐 그의 옷에는 군데군데 얼룩이 묻어 있었고, 아내는 종종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러나 와이셔츠깃에 묻은 뻘건 자국은 핀잔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동훈은 습관적으로 온라인 쇼핑 앱을 켰다. 구매 이력을 뒤져보니 면접을 위해 오래전 와이셔츠를 구매했던 기록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구매 버튼을 손쉽게 누르고 화면을 끄자마자 불현듯 불안이 엄습했다.


‘같은 사이즈가 지금도 맞을까?’


다시 앱을 켜 확인하니 결제 실패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등록해 놓은 결제 카드는 막힌 지 몇 달째였다. 열 자리를 돌파했다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고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또다시 머리를 부여잡은 동훈은 하는 수 없이 TV 받침대 밑 서랍을 뒤졌다. 서랍에는 잡동사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훈련소에서 찍은 필름사진들과 팀원들과 찍은 스티커 사진들, 파일 홀더에 끼워진 매매계약서와 등기필증, 그리고 얼마 전에 받은 가정법원에서 날아온 서류봉투. 틈을 헤치고 아래에서 아내가 집을 나가며 줬던 것으로 추측되는 반짇고리를 꺼냈다. 자개가 화려하게 수놓인 반짇고리에는 더 오래된 무관심의 흔적이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덮개를 열자 색색의 실뭉치와 바늘, 그리고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가 들어 있었다. 단추를 치우고 군청색 실을 꺼냈다.


‘군대에서는 자주 했었는데.’


십여 년 만의 땜질은 손에 잘 익지 않았다. 바늘귀에 실을 꿰려던 그는 자신에게 수전증이 생겼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바늘귀와 실의 조우를 방해하는 것은 수전증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빠진 숨결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시야에 현관 앞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망루처럼 높게 쌓인 배달용기들과 담배꽁초가 가득 든 초록빛 소주병들이 만든 방벽, 그 견고한 방어벽을 택배 박스가 바리케이드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눈에 띄게 불룩해진 배를 이끌고 현관까지 전진하며 뚫어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TV에서는 어느새 뉴스가 끝나고 귀농 청년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있었으나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몇 분간의 사투 끝에 실을 꿰고 매듭을 지은 뒤 바늘을 찔러 넣었다. 촘촘히 엮인 고급스러운 천 조직을 뚫고 나오는 바늘의 기세가 손끝으로 기분 좋게 전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언제나 머리가 아닌 손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통증이 곧바로 뒤따랐다. 동훈은 두 손을 부여잡고 손끝을 살폈다.


핏방울이 검지 끝에 발갛게 익은 산나무 열매처럼 맺혔다. 어린아이처럼 상처 난 손가락을 입에 넣자 비릿한 단향이 상큼하게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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