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유지에서
어느새 어둑해진 대합실에는 각양각색의 차림을 한 여행객들이 앉아 있었다. 하와이안 셔츠에 꽃무늬 반바지를 입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무리와 정장에 코트, 그리고 구두까지 갖춰 입은 비즈니스맨, 네다섯 살로 보이는 어린아이 둘을 각각 무릎에 앉히고, 겨울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부부까지. 나에겐 공기가 조금 서늘하다고 느껴졌지만 그래도 참을만했다. 이 고요함에 잠시 의식을 맡기고자 눈을 감자 근처에서 중년의 여성이 중얼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꺼풀 아래로 짧게 자른 머리를 한 아주머니의 모습을 상상한다.
“말도 마. 초등학교 동창 따라 적성에도 안 맞는 식당을 하겠다고. 그 양반은 말이야. 자기가 손님으로 식당에 가도 종업원 눈을 못 마주치는 인간이란 말이야.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그 인간이 소심해도 고집은 원체 황소고집이잖아. 일 년 만에 가게도 못 넘겨서 권리금 오천만 원만 홀랑 날렸지 뭐. 그 돈으로 가족들끼리 해외여행을 가면 얼마나 좋아?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잠시 시간 좀 갖자고 한 것 아니겠어? 지금 언니랑 나와 있어. 호주 가서 물놀이나 하고 오려고. 내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수영 선수였던 거 알지? 그때 남편만 안 만났으면 국가 대표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앳된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흰 피부에 야윈 체형을 한 학생을 상상한다.
“네, 엄마. 지금 도착했어요. 아니 독일은 아니고 경유하러 싱가포르 공항에 내렸어요. 세연이요? 세연이는 아직 한국에 있죠. 괜찮아요. 영원히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뭘. 다시 돌아와서 만나면 돼요. 결혼이요? 지금 제 나이가 몇인데 벌써 결혼을 해요. 걔는 걔대로 전문직 시험 준비하고 있을 거라고 했어요. 한 번씩 놀러 오면 되죠. 저도 이제 첫 학기예요. 세연이도 이제 4학년이고. 하하. 요즘은 다 이렇게 연애해요. 각자 자기 길을 가면서 만나는 거죠. 에이… 요즘 누가 가정주부를 해요. 세연이도 꿈이 있는데 그리고 지금 같은 시대에는 둘이 맞벌이하지 않고는 결혼 못해요. 그런데 네? 박사 학위 마치면 돌아올 거냐고요…?”
굵직한 쇳소리가 이야기를 받는다. 나는 각진 얼굴의 회사원을 떠올려낸다.
“이번 출장이 마지막이지 뭐. 친한 동료들한테만 이야기했어. 나도 슬슬 독립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내가 벌써 곧 40인데 선배들한테는 벌써 압박이 들어오나 봐. 어제도 김 차장님이랑 한잔했는데 TFT 팀장 자리로 가라고 하더래. 말이 팀장이지 거기는 거의 분리수거통이야. 예산 배정도 결정 나지 않은 팀의 팀장 자리에 가서 뭘 한다고 그래? 그 형, 매년 인사 평가 최고점 받던 사람이야. 형수랑도 이혼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왔을 만큼 회사에도 헌신적이었다고. 그 형 하도 뉴델리로 출장을 많이 다녀서 피부가 거의 인도 사람이라니까? 나? 우리 와이프가 곧 출산이야. 그 형 팀 옮기면 바로 내가 인수받을 건데 매달 출장 나가는 게 말이나 되냐? … 뭐? 이혼하고 임원 달라고? 너 말 다했냐?”
열띤 목소리를 나름대로 한껏 줄인 목소리가 대합실의 고요를 깬다. 나는 새카만 얼굴의 청년을 떠올린다.
“원우야! 나 저번주에 드디어 2부 리그 계약 마쳤다. 이제 주급으로 그래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어. 그런데 그거 아니? 너도 조금만 있으면 올라올 거야. 치앙마이 FC 감독 알지? 이름이 뭐였더라…? 어제 우리 팀 감독이랑 같이 통화하는 거 몰래 들었는데. 지금 윙 백을 한 명이 빌 거라고 하더라고. 감독에게 모르는 척 내가 이야기했지. 지금 잠재력이 제일 올라온 애가 3군에서 돌고 있다고. 네가 수비하는 영상 내가 슬쩍 보여줬다. 감독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자기한테 동영상 보내달라고 하더라고. 우리 팀은 지금 자리가 없지만… 우리 나중에는 1군이나 K리그에서 만나야지. 뭐? 아버지가 돌아오라고 하셨다고? 공무원? 공 차던 애가? 나 지금 휴가 받은 김에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만나서… 만나서 이야기하자! 내 이야기 먼저 들어봐!”
교차로에 산재한 이야기들 때문에 하마터면 쿠알라룸푸르행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