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有用)과 무용(無用)

by 만절필동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산을 많이 탔습니다.

많다는 것이 상대적인데, ‘많다’는 나의 기준은 따로 없습니다.

그저 돌이켜보면 부족하지 않은 충족감이 있습니다.

‘좀 더’의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젠 그만’을 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전을 돌이켜보는 기억에 드러나는 추억들이 아직 다하지 않아서 ‘많다’는 느낌인 듯합니다.

따라나선 여행길, 산길은 코스가 어지럽습니다.

되살아나는 추억의 코스들은 스스로 준비한 길들입니다.

뚜렷한 것은 뜻하지 않게 마주했던 경험들입니다.

‘길이 끝난 곳에서 여행은 시작된다’라는 말은 내 추억의 팔 할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나의 감옥 길의 시작이었고, 여전히 안내서입니다.

처음 가는 산길에서 매번 펼쳐보던 1:5000 지도 같습니다.

이제는 손에 든 스마트폰의 GPS와 수많은 트렉 데이터들로 그 많던 지도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됐습니다.

그가 감옥을 나와 걸었던 길들의 지도가 <더불어 숲>과 <나무야 나무야>입니다.

그의 길을 뒤따를 때면 무언가 받아 적어야만 하는 걸음입니다.

잠시 한 눈이라도 팔면 길잃은 것처럼 그의 글들을 찾습니다.

글이 길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이미 앞서가신 걸음을 급히 뒤따를 때면 숨이 가쁘기도 합니다.

그의 길 하나가 끝나면 내 가슴에 받아 적은 감동이 빼곡하곤 합니다.


모든 설명을 다 하지 않고 줄 바꿈을 하는 시(詩)를 바짝 좇아가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처음 가는 산길에 띄엄띄엄 있는 표지기와 케른(cairn)을 찾아가는 느낌입니다.

다 하지 않은 말(言)이 시(詩)인 것은, 산사(寺)에서 듣는 말씀(言)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은 시집이었다. 그 책을 나는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말라>시인 류시화의 인도기행을 읽고 있습니다.

시인의 글이어서 그런지, 길이 끝난 곳에서 시작되는 그의 여행길이어서 그런지, 마주치는 그의 길마다 시(詩)를 읽는 느낌입니다.

처음 가는 여행길에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모습들이 시(詩)가 되는 것은, 이전에 내가 살았던, 보았던 것들과 달라서입니다.


처음은 언제나 시(詩)가 됩니다.

초행길을 나설 때는 언제나 준비물이 많습니다.

걷다 보면 하나씩 필요 없는 것들이 생기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먼 길을 가려면 눈썹마저 뽑아두고 나선다’라고 하지요.

시인에게 글감은 영감이 준비되어서 일 겁니다.

시인은 인도 전역을 발로 다니며 보고 듣고 느끼는 순간마다 놓치지 않으려고 목에 펜을 달고 다닙니다.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보다는 가벼울 듯합니다.


시인은 어느 날 만원 버스 지붕 위에서 커다랗고 움푹 파인 검은 눈을 가진 인도 노인을 만납니다.

노인은 시인의 목에 걸린 볼펜에 관해 묻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직업을 설명하고 여행길에 꼭 필요한 볼펜의 유용성을 자세히 늘어놓습니다.

노인은 그렇다면 더더욱 볼펜을 목에 걸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일러 줍니다.

영감은 경험을 통해서 생겨나고, 그것은 영원히 잊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에 걸리는 게 아니라,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인의 글감과 영감은 가슴에 새겨져야, 그것이 다른 사람의 가슴을 울릴 수 있다고 노인은 말합니다.

그래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시인이라면 더더욱 볼펜을 목에 걸고 다니면 안 된다고 합니다.


나는 지금 시인의 글을 읽고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시인이 볼펜으로 옮겨 놓아서입니다.

볼펜이 무용(無用)이 아니라, 유용(有用)입니다.

그러나 감동은 볼펜의 유용(有用)이 아니라 무용(無用)입니다.

노인의 말은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와 닮았습니다.

볼펜은 방편(方便)입니다.


시인이 남긴 인도의 모습은 때론 코미디인데, 오래 남는 감흥이 있습니다.

시인이 지저분한 식당을 찾았습니다.

크지 않은 식당인데 메뉴판에 음식 가짓수는 셀 수도 없습니다.

적당한 음식 그림을 보고 주문했습니다.

음식 맛은 전혀 달랐습니다.

시인이 불평하자, 식당 주인이 답합니다.

팔자수염은 거만한 그의 말투를 닮았습니다.


“음식이 메뉴판과 다를 때는, 메뉴판을 믿지 말고 음식을 믿으시오!”


오랜 인도 요리법에는,

“음식에 소금을 넣으면 간이 맞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소금에 음식을 넣으면, 짜서 도저히 먹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 아래 한 줄 따라붙습니다.

“인간의 욕망도 그렇다. 삶 속에 욕망을 넣어야지, 욕망 속에 삶을 넣어서는 안 된다.”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에 글을 다 넣을 수는 없으니, 짧은 글 속에 마음을 넣습니다.

오래된 인도의 노래/시(詩)라고 합니다.


태양에 그을린 갈색 피부

처럼 검은 머리

공작새처럼 쳐다보는 눈

신은 이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고 나서

어떻게 세상에 내보낼 수 있었을까

그는 눈이 멀었단 말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