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끝나고 난 뒤, 모두가 떠나고 난 뒤, 객석에도, 무대에도,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세광 대중가요』
언제, 누가 읽고 두고 갔는지, 누가 찢고 불렀는지, 부르다 찢고 갔는지 모를 낡은 노래집을 펼치다 반쪽만 남아 있는 가사를 속으로 불러보았습니다.
나도 몰래 가사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연극이 끝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나는 객석에도, 무대에도 있지 않습니다.
내가 연기를 봤는지, 연기했는지 기억에 없습니다.
나는 객석의 그림자도, 무대의 조명 빛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정적만이 남아서 어둠만이 흐르고 있는 것만큼은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독자가 읽는 시(詩)와 시인(詩人)이 읊었던 시(詩)는 서로 같은 것일까요?
시는 하나여도 시인과 독자가 한 사람은 아닙니다.
시인의 자리가 무대라면 독자의 자리는 객석입니다.
시인이든 독자든 모두가 떠나고 난 뒤, 시(詩) 또한 혼자만 남아서 어둠만이, 고독만이, 정적만이 흐르는 노래인 듯싶습니다.
시인이 세상을 노래한다지만 세상을 좇아가는 유랑(流浪)은 아닌 듯합니다.
바람이 어느 한 방향만을 정해놓고 따라가지는 않지요.
어둠과 고독, 정적이 미동(微動) 같아도 “흐르고 있죠”라고 노래하는 것은 바람이 흐르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시(詩) 또한 바람입니다.
시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넙니다. 방랑(放浪)입니다.
유랑(流浪)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이지만, 머물 수 없는 이유와 머물 수 있는 이유를 찾아 떠나는 모습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를 달고 있습니다.
방랑(放浪)은 머물 수 없는 이유도 없고, 머물 수 있는 이유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자기(自)의 이유(由)를 가진 게 유랑(流浪)이라면, 그조차 붙들지 않는 게 방랑(放浪) 일 듯합니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유랑이라면, 내가 가는 길은 방랑입니다.
가야 할 길과 가는 길이 막힌 여기서 나의 ‘떠돎’은 글들을 흘려보내는 유랑과 방랑의 여행 중입니다.
흐르는 것들마다 이유가 없지야 않겠지만, 흐르는 것에서 그 이유를 따져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호수에 비친 조각달이 물 위에 떠 있는 이유야 있다 해도, 조각달을 건져 낼 까닭을 찾지는 않습니다. 한다 해도 되지도 않을 일입니다. 어리석은 휘저음만이 혼탁케 할 뿐입니다.
유랑과 방랑의 구획을 긋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다만 흐르는 모든 것은 그래 보입니다. 물이 그렇고 바람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바람이고 싶습니다.
방향과 그 끝을 미리 정하지 않아도 떠남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여행의 시작은 ‘떠남’이라고 했습니다.
여행의 끝이 ‘돌아옴’이라지만, 그 자리를 미리 시작점으로 고집할 이유는 없습니다. 황하가 만 번을 꺾이는 흐름을 가져도 한 번 꺾인 자리를 두 번 다시 흐르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감옥을 ‘떠나는’ 꿈을 꾸다, ‘감옥으로’ 떠나는 여행을 생각합니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여행은, ‘떠나기 전’에는 무언가 들뜨게 하는 매력을 지녔고, 다녀온 후에는 다음의 또 다른 ‘떠남’을 기다리게 하는 중독성을 지닌 것 같습니다.
여행은 ‘떠남’이지만, 새로운 ‘만남’입니다.
내일의 만남을 기대하며 어제의 만남을 떠나는 길입니다.
여행에 대한 기대와 중독은 바로 이 ‘새로운 만남’ 때문입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만남이 여행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가장 힘든 여행이 가장 오래 남는 추억이 됩니다.
평생 잊지 못할 만남의 기회를 얻는 것이 인생 최고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여행은 바로 ‘나를 찾아 나서는 길’입니다.
나를 찾는, 찾을 수 있고,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여행지가 감옥입니다.
감옥으로 떠나는 여행을 계획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감옥 패키지’를 꾸릴 여행사는 그 어디도 없습니다.
아무나,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도 아닙니다.
홀로 배낭을 메고 용기를 내어 나설 곳도 아닙니다. 추천할 사람도 가이드도 없습니다.
누구도 찾지 않을 ‘여행지’이고, 추천지도 아닌 곳이기에 그 누구도 없을 곳 같지만, ‘감옥’은 언제나 붐비는 곳입니다. 살과 살을 맞대어야 잘 수 있는 곳입니다.
떠나간 사람들도 있고 떠났던 이들 중에 다시 찾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게 오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여행’ 기간이 다릅니다.
더 머무르고 싶어도, 더 빨리 떠나고 싶다 해도 기간을 자신이 정할 수 없는 곳입니다.
감옥은 분명 여행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여행이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면, 최상의 여행지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 해도 나조차 추천하지 않을 것은 물론입니다.
감옥이 누구에게나 ‘나를 찾는 길’이 아니기도 합니다.
감옥이 ‘나를 찾은 길’이 되지 못한 이는 다시 찾아오기도 합니다.
감옥이 ‘나를 찾은 길’이 되었다 해서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감옥은 떠나고 싶은 곳이지, 감옥으로 떠나고 싶은 곳은 아닙니다.
안과 밖의 차이입니다.
감옥은 목적지가 아니라, 출발지입니다.
여행은 ‘떠남’이라고 했지요.
'떠남'은 '만남'이라고 했지요.
'나를 만나러, 찾으러 떠나는 길'이라 했지요.
감옥이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 되는 최고의 여행지가 될 수 없는 것은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이 최고의 여행지임을 아는 길은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감옥여행' 홍보는 오직 안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뿐입니다.
감옥에서 '나를 찾는, 나를 만나는 길'로 떠나는 일입니다.
사방이 막힌 감옥에서 유일한 탈출구는 하늘입니다.
고개를 들고 마음껏 날아야 이곳을 떠날 수 있습니다.
날기 위해 뼛속까지 비워야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당신의 20년 옥중생활을 ‘인생대학’이라고 불렀던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이 큰 배움(大學)을 얻는 곳이라면, ‘나를 찾아야 할’ 큰 배움의 터로 ‘감옥’을 성찰할 이유가 충분할 겁니다.
“행복의 비밀은 무엇을 잃었는지를 기억하는 데 있지 않고, 무엇을 얻었는지를 기억해 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은 오직 수인(囚人)들에게만 허락된 수행지(修行地)입니다.
그래서 감옥은 “어제 죽은 것처럼 오늘을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야 할 곳입니다.
오늘 읽은 한시(漢詩) 한 구절이 나의 여행지에서 당신에게 보내는 엽서이면 좋겠습니다.
欲窮千里目(욕궁천리목)
更上一層樓(갱상일층루)
멀리 천리를 바라보고자
다시 누각 한 층을 더 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