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만세 Aug 08. 2019

노는 기록 - 8일

2019년 5월 7일 / MBCC, 코펜하겐, 덴마크




긴 이야기가 시작된 곳은 2014년 여름, 경리단이었다.


지금이야 수제 맥주, 혹은 크래프트 비어라고 불리는 하나의 장르가 흔해졌지만 5년 전만 해도 그것은 언더그라운드, 그 자체였다. 맥주를 좋아했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원래 알콜을 잘 소화시키지 못하는 체질이라 술은 그냥 근성으로 마셨고, 탄산도 잘 견디지 못하는 편이라(가지가지했다) 맥주는 나에게 끔찍한 주종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인생은 내 선호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쪽으로 나를 이끌기도 하며, 운명은 사각지대로부터 튀어나오고는 하는 법이라, 나는 그 해 여름 경리단에서 페일 에일이라는 것을 처음 마시고 말았고 그 이후 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맥주 업계에서 일했다.

지금은 격동의 도시 서울의 젠트리피케이션에 집어삼켜져 쓸쓸해져 버렸지만, 그 해의 경리단은 크래프트 비어의 성지이자 태동의 거리였고, 뭣보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채워진 살아있는 곳이었다. 당시 퇴사 후 백수 라이프를 즐기고 있던 나는 여러 가지 맛의 맥주를 많이 마셔볼 요량으로 한 맥주 스타트업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한 달만 일할 생각으로), 그게 곧 개고생의 서막이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신나는 일들도 많았다. 2015년에는 Mikkeller라는 덴마크 크래프트 비어 회사의 서울 펍 오픈에 합류했고, 꾸준히 미켈러바 서울을 위해 일했다. 어쨌든 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이 Mikkeller라는 회사가 일 년에 한 번씩 코펜하겐에서 주최하는 맥주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현재는 일 년에 한 번은 코펜하겐에서, 한 번은 도쿄에서 열린다) 미켈러의 맥주 축제(Mikkeller Beer Celebration Copenhagen)가 시작된 지는 꽤 오래되었고, 해가 갈수록 그 규모가 커져 현재는 가장 핫한 크래프트 비어 행사가 되었지만 그동안은 한 번도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펜하겐은 너무 멀고 비싼 도시였으며, 행사 티켓 가격 또한 절대 저렴하지 않았다. (세계 정상급의 맥주들이나 구하기 어려운 맥주들을 한자리에서 마구 마실 수 있는 메리트가 있지만 어쨌든 무척 큰 비용이 든다) 그런데 작년 가을, 도쿄에서 첫 축제가 열릴 때 방문해보고, 원 없이 좋아하는 맥주들을 마셔보고 나서, 문득 코펜하겐에 못 갈 건 또 뭐야, 라는 생각이 들길래 무작정 비행기 티켓을 예약했다. 물론 직원 코드로 구매하면 축제 티켓이 어마어마하게 싸진다는 것도 작지 않은 이유였다.


그리하여 5월 8일부터 5월 12일까지, 단순히 맥주를 (최대한 많이) 마시기 위한 여행이 다가왔다. 필요한 것은 건강한 간과 제산제, 술을 엄청나게 퍼먹어도 걸을 수 있는 굳건한 체력이었고, 5월 7일 밤, 며칠 동안 연인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과 혼자 멀리 떠난다는 사실로 인한 불안감이 문득 휘몰아쳐 공항 철도에서 청승맞게 눈물을 훔치다가 비행기가 묵직한 몸체를 상승시키는 동시에 기절했다.


경유지는 암스테르담, 무척 오랜만에 긴 비행이 시작되었다.


이전 07화 노는 기록 - 7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