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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만세 Aug 14. 2019

노는 기록 - 9일

2019년 5월 8일 / MBCC, 코펜하겐, 덴마크




조금 진부하고, 또한 감상적이지만 일을 하면서 얻은 것은 사람이었다.


5년 남짓의 시간 동안 정말이지 수많은 맥주를 마셨고, 그 완성도와 창의성에 감동한 적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하게 나를 이곳에 붙잡아둔 것은 다름 아닌 술친구들이었다. 술을 업으로 삼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술’이 매개가 되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많았고 흔히 우리가 가지는 술에 대한 묘한 편견들에 빗겨, 나는 좋은 사람들을 과하게 많이 만났다. (운이 좋았다) 이번 코펜하겐 여행 역시도 데니쉬 친구의 도움이 무척 컸는데, 그는 내가 맥주 일을 시작할 무렵 우연히 알게 된 후, 지금까지도 한국을 방문하면 꼭 함께 맥주를 마시는 친구가 되었다. (그는 한국 친구들이 많은 탓에 일 년에 한두 번은 한국에 방문한다) 4년 전 덴마크 회사인 Mikkeller와 일하기 시작할 무렵 출장으로 코펜하겐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는데, 낯설기만 한 곳에서 일하는 동안, 그 친구는 나에게 코펜하겐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었다. 또한 오래전부터 크래프트 비어를 사랑해온, 슈퍼 Beer geek이어서 코펜하겐에서 일어나는 모든 맥주 관련 이슈들을 알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MBCC(Mikkeller Beer Celebration Copenhagen) 행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행사 주간에 코펜하겐 곳곳에서 어떤 맥주 이벤트가 열리는지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 MBCC행사는 이틀 동안 열리지만, 거의 일주일 내내 도시 곳곳의 바에서 다양한 이벤트들이 열린다)

MBCC는 5월 10일과 11일 이틀이었고, 친구가 알려준 몇몇 이벤트에 참석하기 위해 5월 8일 오전에 코펜하겐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공항에 마중을 나와 주겠다고 하길래 ‘출근 시간 아니야?’라고 물었더니, ‘축제 주간에 누가 일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하여 나는 수요일 오전 8시경, 덴마크 맥주축제에 최적화된 현지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는 공항에 도착했고, 티켓 역할을 하는 손목밴드를 찾기 위해 코펜하겐 공항에 있는 Mikkeller Bar에 들렀다가 ‘토르’라는 이름을 가진 스탭의 꼬임에 빠져 잠도 덜 깬 와중에 맥주를 한 잔 했다. (‘토르라면 그 토르?’라고 물었더니, ‘응, 그 왜 망치 들고 다니는 애 있잖아.’라고 했다) 축제가 시작되었다.


숙소에 짐을 대충 풀어놓고 긴 비행이 안긴 피로감을 조금 씻어내기 위한 샤워를 끝내기 무섭게, 술 마시는 일정이 시작되었다. Mikkeller는 전 세계 곳곳에(서울을 포함해서) Mikkeller Bar를 열었고 지금도 열고 있는데, 코펜하겐은 그들의 본진답게 각기 다른 컨셉의 Mikkeller Bar가 포진되어 있는 곳이었고 축제 주간에는 이 많은 바들에서 각각 다른 이벤트가 열리는데, 내 첫 번째 일정은 Mikkeller의 첫 번째 바(오리지널 바라고도 불린다)에서 열리는 탭 테이크 오버였다. (Tap Takeover는 맥주 바 혹은 펍에서 한 브루어리의 맥주들을 이벤트성으로 선보이는 것으로, 평소에 운영하던 탭 라인업 전체 혹은 일부를 교체한다) 탭 테이크 오버의 주인공은 플로리다의 브루어리, Angry Chair였는데 시나몬, 코코넛, 커피, 카카오 빈, 바닐라 등의 다양한 부재료를 넣거나 위스키 등을 숙성시켰던 오크통에 다시 숙성시킨, 도수 높은 흑맥주로 유명한 브루어리였다. 말인즉슨,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시차를 인지하기도 전에 10도 이상의 맥주 열댓 종류를 소화한다는 것인데, 참으로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이벤트는 정오에 시작이었으나, 오전 11시가 넘은 시각부터 작은 바 앞에는 줄이 길었고, 어쩐지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뭐랄까, 생생한 덕후들의 현장이었다) 나의 친구 역시 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몇몇 술친구들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나를 소개해 주었다. (코펜하겐 일정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이들을 만났다) 12시 정각에 바가 열리고, 맥주 서빙이 시작되자 내 친구들 무리는 각자 다른 맥주들을 주문했고 모여 앉아 서로 맥주를 나눠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학파라도 탄생하는 분위기였다) 맥주 종류가 많아 선택의 기로에 선 나에게 그들은 맥주를 나누어 주었고, 그러다 보니 모든 종류를 마셔볼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을 나눠 마시고, 좋아하는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는, 아주 빠르게 북유럽 한복판의 작은 도시와 그보다 더 작은 맥주 씬에 적응하고 있었다.


Angry Chair의 맥주들은 훌륭했다. 흑맥주와 도수 높은 맥주, 단맛이 강한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취향이라는 것은(특히 술 취향) 신비롭고 변덕스럽다. (물론 고집스러운 코어는 있지만) 맥주 한 잔에서 커피와 초콜릿, 바닐라와 위스키, 쓴맛과 단맛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인 동시에 집요한 예술이다.


오후 2시가 되기도 전에 나는 취했으나,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우리는 걸어서 큰 몰 안에 위치해 있는 Mikkeller의 바틀샵(병맥주와 캔맥주 등을 판매하는)에 들러 친구가 집에서 가지고 나온 벨기에 맥주를 스탭들과 나눠 마신 후(친구는 문턱이 닳도록 바나 바틀샵을 오고 가는 바람에 많은 스탭들과 친했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Mikkeller Baghaven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곳으로, 다른 Mikkeller의 바들과 다르게 양조와 숙성, 블렌딩을 하고 있는 곳이다. 효모의 역할이 눈부신 Wild Ale을 주로 양조하며, 다양한 과일과 오크통 사용으로 발효에서 오는 산미와 동시에 풍부한 과일의 풍미, 시간의 맛까지 느낄 수 있으며, 각각의 다른 맥주들을 블렌딩 하여 새로운 개성까지 부여하는 재미있는 곳인데 유일한 단점이라고 하면, 시티 중심에서 좀 멀다는 점이다. 하지만 덕분에 도착했을 때,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어서 영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4년 전에 갔을 때에는 Baghaven이 생기기 전이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첫 번째 방문인데, 굳이 맥주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꼭 한번 방문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층고가 높고 창문이 많은 내부로 들어가면, 높은 곳까지 쌓여있는 오크통을 볼 수 있고,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은 크지 않았지만 밝고 쾌활했다. 저녁 해가 지기 전의 고요함과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외부 좌석에서는 술을 마시며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강을 볼 수 있었고, 멀리 도시가 보였다.


물론 맥주도 맛있다.


그날 Baghaven에서는 한정 맥주 릴리즈가 있었다. Mikkeller를 이끌고 있는 대장 Mikkel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는데, 그는 매년 딸들의 이름을 딴 맥주를 Baghaven에서 양조하고 있고, 그렇게 탄생한 맥주가 Stella와 Polly인데, 5월 8일은 Stella2019와 Polly2019의 런칭일이었던 것. 우리는 간단히 맥주 한 잔씩을 하고, Stella와 Polly 한 병씩을 산 후 밖으로 나왔고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는 강 근처에서 Mikkel과 그의 딸들을 만났다. 나는 Mikkel에게 인사했고, (안녕하세요 보스) 그는 나에게 고맙다고 말했는데 그 와중에 Stella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녀에게 이름을 말해주고 뒤돌아 걸으며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맥주가 매년 나온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지금은, 혹은 좀 더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는 어떤 기분일까.


도시에는 느릿느릿 어둠이 깔리고 있었고, 하루 종일(문자 그대로 하루 종일) 술을 마신 탓에 배가 고팠다. (나는 술을 오래 마실수록 배가 고파지는 사람이다) 다행히도 친구가 약 한 달 전에 예약해둔 레스토랑의 예약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우리는 옅은 어둠을 밟으며 강가를 걸었다. 친구가 반드시 가봐야 한다며 기대감을 잔뜩 심어 주었던 레스토랑은 Barr라는 이름을 가진, 맥주와 음식의 페어링이 기가 막히다는 곳이었는데 테이블에 놓인 맥주 리스트를 펼치자마자 나는 바로 깨달았다. 그곳이 바로 배고픈 맥주 팬들의 천국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미식의 도시 코펜하겐)


레스토랑 내부는 아늑하고 편안한 동시에 절제되어 있었고, 서버들은 하나같이 친근함의 적정선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맥주 리스트는 미국과 벨기에, 네덜란드와 덴마크를 오가며 우아하게 빛났고, 시간을 들여 차례로 나오는 음식들은 하나같이 따뜻하고 흥미로웠다. 우리는 단맛과 신맛이 알맞게 익은 맥주와 함께 오랫동안 식사했고, 그날 하루 종일 마신 맥주들과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맥주를 많이 마셔오며 얻은 것은, 기이하게도 지식보다는 사람이었다. (알콜 때문에 잊은 것들이 많은 탓인지도)  축제가 도시를 서서히 취하게 하고 있었고, 맥주를 마시기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만나는 순간 단숨에 친구가 되었다. 코펜하겐 공항의 도착 게이트를 나선 후로 꼭 12시간이 흘렀고, 나에게는 그새 다음날 또 볼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생겼다.


낯선 사람들, 내일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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