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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신만나드립니다 Dec 28. 2023

영미문학을 번역하는, 이윤진 한의사 (1편)

낮에는 한의사, 밤에는 전문 번역가로서의 삶

대만드의 낙타는 어느 날 소설 『거울의 책』을 읽던 중 역자 소개란에서 이윤진 한의사님을 뵙고 흠칫했습니다. 이 책의 번역가가 한의사였다니요! 반가운 마음에 낙타와 백조는 인천 송도에서 활동 중이신 이윤진 번역가님을 만나 뵙고 왔습니다. 진료와 번역, 두 가지를 병행해 오신 이윤진 번역가님의 이야기를 만나 보시죠!
이윤진 번역가님 약력
- 원광대학교 한의학과 졸업
- 한방내과 전문의
- 『거울의 책』,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굿 라이어』 등 영미문학 작품 다수 번역
- 한의협 소아청소년위원회 출판 지원 응모사업을 통해 소설 『허준의 후손은 고3 수험생』 출간

Intro

Q. 안녕하세요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 번역가이자 밤에는 작가 생활을 하고, 손이 아주 많이 가는 아이 둘을 키우는 한의사 이윤진입니다.


Q. 요즘 번역가님의 하루 일과일주일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대략적으로 낮에는 아이를 돌보거나 한의사를 하며 돈을 벌고, 밤에는 번역 작업을 하고 있어요.



번역가가 되기까지

Q. 학창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고 하셨는데한국의 한의학과에 들어오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한국 나이로 4살에 미국으로 가서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들어왔어요. 또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나가서 중학교 2학년 때 마지막으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총 합치면 한 9년 정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냈지만, 양쪽을 오갔기 때문에 양쪽 언어 모두에 조금은 장벽이 있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언어를 공부해도 더 빠르게 궤도에 오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죠.


제가 원래 의대에 가겠다고 그랬더니, 저희 부모님이 ‘너 손이 느려서 안 돼’ 하시고, 치대에 가겠다고 했더니 ‘하루 종일 입 벌리는 사람들 보고 있어서 살 거냐’ 하셨어요. 그런데 한의대에 가겠다고 했더니, ‘그래’ 해서 한의대에 왔죠.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 말씀이 절대적이었어요. 그렇게 한의대를 들어오고 나서, 후회할 때도 있었고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어요. 돌이켜봤을 때 제가 후회했던 이유는, 이 진로를 선택하는 단계가 오로지 제 선택이라 못 느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이후로 주도적으로 진로를 선택하는 연습을 하면서 후회가 많이 사라졌어요. 한의대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할 때는 일하고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인 것 같아요. 일하고 나서 감사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직종이 몇 가지 없어요. 번역 분야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게 칭찬인 것처럼요. 근데 감사하다는 얘기를 듣는 게 생각보다 큰 힐링이 되거든요. 최선을 다했을 때 감사하다는 피드백을 받는 직종을 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Q. 한의대에서 번역가님은 어떤 학생이셨나요그때도 문학 또는 번역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노는 학생이었죠.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고, 굉장히 많은 경험에 목말라 있는 학생이었어요. 고3 때까지는 치열하게 입시를 위해서만 살았다면, 대학교에 딱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자의적으로 많은 것들을 경험하리라는 생각이 강했어요. 과외 대신 번역 알바를 한 것 역시 시간을 제 마음대로 쓰기 위해서였죠. 대학생 때는 여행도 많이 다니고 한의원도 엄청 많이 찾아다녔어요. 또 한의사 외의 분야에 관심이 있을 때면 그 분야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만나러 다녔죠. 대학생 때만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일들도 다 해보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문학에 대한 관심은 변함없었어요. 이사를 자주 다니고 늘 변화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제 성장 환경이 일관적이지 않았는데요. 그렇게 외부로부터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늘 책을 읽었어요. 책은 제가 옛날부터 읽어온 아는 맛이기 때문에 책에서 안정을 찾았어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요.


Q. 졸업 전에 반드시 해보기를 추천하는 공부나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1순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학문적인 지식은 학교 공부만 다 따라갈 수 있었다면 졸업 후에 충분히 보충할 수 있어요. 하지만 한의사가 결국 사람을 상대하는 직종이라는 점이 관건이거든요. 얼마나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얼마나 상대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으며 얼마나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데, 그게 어려우면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되거든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서 사람을 대하기 위해서는 정말 한 사람의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많이 알고, 그 사람이 현 상태에 도달하기까지의 뒷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 많이 여행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이 연애도 하면서 많은 사람들하고 싸워도 보고 같이 잘 지내도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사람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병원 생활을 감사하게 생각하기도 해요. 저는 전문의 과정을 하며 뇌졸중이나 파킨슨병 환자들을 많이 보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인생이 잘 나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러면서 자녀들이 변한다거나, 부부 사이가 변해 가정이 깨지거나 오히려 돈독해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어요. 제가 학생 때 밖에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각 분야에서 건강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면, 병원에서는 각 분야에서 바닥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되게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바닥을 찍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기 두려워 도피하는 분들도 보았고요. 그 과정에서 사람의 본질이나 삶의 동력을 느끼는 법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해 보게 되었어요. 직접 옆에서 지켜보며 제가 담당하는 환자의 이야기를 함께 경험하다 보니 제 시야도 넓어졌고요.


Q. 중증 환자들을 보며 사람이 살아가는 동기에 대해 많이 고민하셨는데번역가님은 어떤 해답을 내리셨나요?     


사람에게 목적이나 의지, 그리고 의미가 굉장히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예를 들어서 내 아이를 구하려다 팔이 잘렸다면, 재활을 힘들어하지 않아요. 그러나 팔이 불의의 사고로 사라졌다면,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고 하는 감정의 5단계가 다 지나가요. 고통이 커서라기보다는, 고통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사람의 목적이나 의지가 북극성과 같다고 생각해요.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서 무엇을 창출할 것인지 해답을 낼 수 있다면. 힘들어도 길을 잃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실제로 환자분이 오셨을 때,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쉴 새 없이 얘기를 나눠요. 그러면 몸이 아픈 것뿐만 아니라 속이 아픈 것도 풀릴 수 있는 계기가 생기죠. 물론 자기 가치는 스스로 찾아야 해요. 누가 찾아줄 수 없어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환자가 자기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화병이나 우울증 환자들을 볼 때 이 점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해요. 그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가치가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씀하세요. 스스로 자기가 여태까지 해온 것들이 별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있는 거죠. 이럴 때 환자분이 자기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셀프 칭찬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서 효과를 볼 수 있어요. 너무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고 가볍게 툭툭 다가간다면 환자분의 거부감도 적고요.


Q. 졸업 후 한방병원에서 일하며 한방내과 전문의를 취득하셨던 계기는 무엇인가요?     


본3 때부터는 번역 알바를 그만두고 공부에 매진해서 졸업 후 심계내과에 들어가 인턴, 레지던트를 했죠. 제가 병원에 들어갔던 건 제가 항상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보는 사람이기 때문이었어요. 레드 존(Red zone)을 파악하지 못하는 당시의 실력으로 임상에 나가 환자를 보면 큰 사고를 낼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본3 때부터 덮쳐 왔었거든요. 그래서 레드 존을 가장 많이 만나볼 수 있는 곳인 병원에 가기로 했어요. 물론 병원 생활은 힘들었지만, 레드 존에 대해서는 확실히 배울 수 있었어요. 병원에서 뇌 공부를 엄청 열심히 했어요. 왜 하필 심계내과를 했을까 후회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제 임상 경험의 70% 정도는 그때 배운 뇌에 관한 지식을 활용한 거예요. 왜냐하면 불면증, 우울증뿐 아니라 자폐 스펙트럼 장애, 발달 지연 등 뇌 발달이 어려운 아이들을 임상에서 은근히 만나거든요. 사실 병원에서는 대부분 환자가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다른 관리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니까 긴장도가 좀 낮았지만, 중증인 아이들을 제가 주치의로서 보려니 공부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뇌 공부를 이어서 하고 있어요.          


Q. 한방내과 전문의까지 마치셨는데번역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또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는 게 쉽지 않으셨을 텐데전문 번역가로서의 커리어는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셨는지 궁금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렸을 때는 한국과 미국에 오가며 지내다가, 중학교 1학년 때 국내에 들어왔어요. 그때 한국어가 너무 어려워서 학교 공부는 기계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죠. 자연스레 번역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스타일로 공부하며 대학에 들어갔어요. 대학에 들어간 뒤로도 이해가 안 되는 우리말 표현을 익숙한 영어표현으로 바꿔서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과정이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죠. 또 동시에 부모님께서 주시던 지원도 끊겨서 생활비를 직접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그룹사운드(밴드)를 했기에 연습 시간도 많이 필요해서, 자유롭게 시간을 조절해서 할 수 있는 재택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번역 일을 시작하게 되었죠. 번역 시장은 출판 번역과 기술 번역으로 나뉘고, 그 안에서도 초벌 번역과 완성 번역이 있어요. 처음에는 기술 번역 중 초벌 번역을 했지만 수입이 더 높은 완성 번역 시장으로 옮겨 일하기 시작했죠.


프랜차이즈 한의원 근무 시절의 번역가님


그렇게 번역 일로 생활비를 충당하다가, 본3부터는 번역 일을 딱 끊고 공부에 매진했어요. 졸업 후에는 인턴, 레지던트를 거쳐 전문의 면허를 취득하고 프랜차이즈 한의원에 들어갔어요. 임상에서 돈 잘 버는 시장에 한번 들어가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거든요. TV에 나오는 원장님들 아래서 마케팅이나 환자의 컴플레인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배웠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제가 이 생활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을지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여자 한의사에 대한 편견이 지금보다 더 강해서, 재활이나 침구보다는 미용이나 소아과 쪽을 하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결국 제가 임상에 나온다면 미용을 해야 하는데,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업계 선배님과 동료들처럼 제 가슴을 뛰게 하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일은 일대로 하되, 취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자는 마음이 생겼어요. 제 취미는 아기 때부터 항상 소설책 읽기였는데,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늘 소설을 읽었죠. 유년기를 미국에서 보냈기 때문에 한국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영어가 그리워질 때면 영어로 된 소설들을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이런 취미를 즐기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자는 생각으로 출판 시장에 뛰어들었죠. 그래서 이력서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어요. 번역 알바 경험이 있기 때문에, 출판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헤드 헌터들이 어떻게 작품을 선별하고 계약하고 출판하는지에 대해서요. 저는 무명인 신인일 뿐 아니라 비전공자이기 때문에, 제 실력을 증명해야 했어요. 그래서 아마존을 열심히 뒤져서 출판계 사람들이 절대 찾지 못할, 그러나 아주 잘 팔릴 만한 책을 찾으려 했죠. 그렇게 한 권을 찾아서 주문해 읽었는데, 어른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청소년 문학인 YA(Young Adult) 작품이었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상도 받은 작품인데 아무 출판사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은 동성애 코드가 있어서 다들 조심스러워했었던 거죠. 하지만 전 초장부터 마음에 무척 들어서 번역을 시작하고, 책의 소개와 수상 내역 및 작가의 배경, 그리고 제 배경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죠. 그리고 문학작품을 출판하는 출판사를 구글링 해서 모든 곳에 보냈어요. 어차피 그중 70%는 거절하리라 생각했었으니까요. 실제로는 그보다도 많은 출판사들이 저를 거절했지만, 두 출판사가 반응을 보였어요. 그러나 제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 작품에 대해 관심이 있었어요. 그래서 양쪽에서 모두 외국 출판사와 저작권 계약을 하려 더 높은 값을 부르다가, 둘 모두 관두게 되었고, 결국 그 작품을 번역하기는 어려워졌어요. 그런데 그중 한 출판사가 신진 외국 SNL 방송작가였던 사람이 낸 책이 있으니 시험 삼아 번역을 해보겠느냐고 연락이 왔고, 정식 계약은 아니었지만 저는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간 구애 없이 보내라고 했음에도 무조건 다음 날까지 완성해서 보냈어요. 무엇을 요구하든 저는 무명이니까 바로 다음 날까지 보냈죠. 그러다 보니, ‘번역 실력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감 기한은 잘 지킨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어요. 비전공자로서 이 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방법은 낮은 가격으로 빠르게 완성해 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진입했던 거죠. 그렇게 시작한 이후로 지금까지 번역을 해오고 있어요. 취미가 일이 되면 재미없어진다는 걸 느끼면서도 계속하고 있죠. 이번 작품만 마치면 절대 다시 하지 말아야지, 하다가도 다시 시작하게 되더라고요. 결혼 후에는 육아를 하느라 풀타임으로 한의원 진료를 하기 어려워졌어요. 그래서 그때부터는 번역을 더 잡기 시작했고,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번역하는 양도 늘어났죠. 지금은 한의원에 주 1회씩 가서 진료하고 있어요. 한의사로서는 언어치료와 난치성 질환으로, 번역가로서는 창작 분야로 확장되고 있는 듯해요.


Q. 처음에는 알바로 시작한 일이 번역가님 인생에 무지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아요.     


그래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제가 되게 많은 분야를 건드려요. 만약 제가 지금 세대의 학생이었다면 온라인에서 다른 방식으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다 해봤을 거예요. 내 시간은 내 마음대로 쓰고 싶어, 라는 마음에 시간 구애를 안 받는 걸 찾다 보니 번역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에 기술 번역을 했던 건 놀고 싶어서였고, 출판 번역을 했던 건 허한 마음을 달래고자, 또 나의 취미가 돈벌이가 될까 하고 도전했던 거죠.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얘기 중의 하나는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말라는 거예요. 진지함은 도움이 안 돼요. 다양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진지할 필요가 없어요. 그게 방해를 많이 해요.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말지'라는 마음으로 살면 대단히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어요. 번역도 제가 처음에 들어갔을 때 두 군데에서만 연락이 왔어요. 그러면 나머지 30개 이상의 출판사는 다 저를 거절했다는 뜻이죠. 하지만 사실 이렇게 새로운 분야를 계속 건드리고 새로운 경험을 계속하는 것에서는 거절이 일상이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진지한 사람은 그걸 견디지 못해요. 저는 거절당했을 때도 타이밍이 잘 안 맞았나 보다, 혹은 내가 아직 부족한가 보다, 다음에 다시 해보면 되지, 하고 넘어갔거든요. 안 맞는 것 같으면 또 다른 거 해보면 되고요. 이런 식으로 계속 도전하다 보니 제 역량이 커질 뿐만 아니라 저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어요.


Q. 낮에는 한의사로밤에는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계신데요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시간 관리가 어렵죠. 시간이 금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공상을 많이 하는 아이였어요. 공상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에서 시간을 아주 화끈하게 써버리잖아요. 그 결과로 많은 일들이 미뤄지다 보니 저희 부모님이 굉장히 답답해하셨어요. 하지만 병원에서 수련하며 시간을 알뜰하게 쓰는 게 몸에 배었죠. 골든타임을 안 놓치기 위해 촉각을 다투는 위급한 환자들을 많이 보며 훈련이 된 것 같아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쓰는지는 한의대에서 놀면서, 또 병원에서 수련하고 프랜차이즈 한의원에서 근무하며 배웠어요. 그때의 훈련들이 지금도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만약 번역 일들이 저 하나만 걸린 일이었으면 아마 중간에 중도 포기도 많이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이 거대한 번역 시장 안에서의 언제든 대체가 가능한, 그리고 한 번 대체되면 다시 끼워질 가능성이 없는 그런 톱니바퀴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또 제가 이 일을 도중에 포기해 버리면 여태까지 시간을 써서 진척시키고 마감 기한을 지켜야 되는 일에 관련된 편집자와 마케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패닉 상태가 오거든요. 이건 거대한 계약 조건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같이 굴러가는 것이므로 나 힘들다고 그만두면 결과를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늘 하고 싶어서 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거죠.


Q. 역자 소개에 지난 20년간 손에서 영미문학을 뗀 적이 없다.”라는 문구가 있는데요한의사가 된 후에도 책 읽을 여유가 있으신가요?


정말 부끄럽지만 제가 그 문구를 썼을 때는 제가 전공자도 아니었고 완성한 작품이 없을 때였어요. 저를 소개할 글이 없어서 그렇게 썼어요. 뜬금없이 한의사라고 하는 건 그 시장에 맞지 않아요. 또 누군가는 이 분야에서 진지하고 목숨 걸고 하고 있는데 한의사라고 소개해버리면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 소개는 사실이기도 해요. 항상 책으로 도피하니까요. 제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존과 결부된 일 같아요. 책을 읽는 건 일종의 제 정신건강을 위한 행위라서, 종이책을 볼 시간이 없을 때는 이동하면서 오디오북을 들어요. 가장 아끼는 책은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와 『빨간 머리 앤』 시리즈, 『해리 포터』를 지나서, 지금은 『헝거게임』이에요. 『헝거 게임』의 여주인공이 여러 가지 트라우마를 가진 주인공이잖아요. 작가가 생각했던 모든 트라우마가 여주인공에게 다 녹아 있어요. 저는 그 작가가 트라우마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트라우마를 진짜 생생하게 잘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또 사람의 마음속에 앞으로 성장과 생존을 위해 싸워야 하는 마음과, 내일의 희망을 기대하며 다독이는 마음이 충돌할 때가 있잖아요. 그 두 가치관의 충돌을 인물들로 굉장히 잘 표현한 것 작품이에요. 하지만 『헝거게임』이 아니더라도, 각자 자기와 궁합이 맞는 책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 책을 읽다 보면 자기의 트라우마를 잘 녹여주는 작가가 있을 거예요. 그걸 찾아서 읽으면 되죠.


번역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윤진 번역가님의 이야기는 2편에서 계속됩니다.


Interviewer. 낙타, 백조

Editor. 낙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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