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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배 Jul 07. 2021

그러니까 나는 8일 중에 5일을 노을만 따라다닌 셈이다

안수룡(얀 스웨이 롱)의 <담수이(단수이)의 황혼>

대만 여행에서의 열흘 중 닷새를 순전히 노을 보는 데에만 사용하였다. 가오메이 습지에서 한번. 샹산에서 한번. 담수이에서 한번, 비탄에서 한번. 그리고 마지막 날 샹산에서 한번 더!


이번이 나의 세 번째 대만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담수이를 찾았고, 나는 또 샹산을 올랐다. (나는 다음 여행에도 또 담수이를 찾고, 또 샹산을 오를 예정이다.) 담수이와 샹산에서 보는 노을은 몇 날, 몇 번을 보아도 예술적이었다. 어린 왕자의 말마따나 할 수만 있다면, 나도 하루에 44번의 노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담수이의 저녁 노을



오죽하면, 한 대만 친구는 나에게 한국에는 노을이 없냐고 물었다. 한국에 노을이 없긴 왜 없어. 한국에도 하늘이 있고, 해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근 몇 년 동안 노을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평일에는 해가 다 지고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퇴근을 하니 노을을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그럼 주말은? 그러고 보니 주말에도 노을을 본 기억이 없다. 빌딩 숲과 아파트 숲에 갇혀 사는 요즘에는 지평선을 볼 기회마저 박탈당하였다. 인근의 공원을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 지평선 너머의 노을을 보기가 힘들다.


그래서 나는 더 대만의 노을이 보고 싶었나 보다. 대만에서는 날씨만 나쁘지 않으면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노을을 즐길 수 있었다. 여행이 주는 안정감과 평온함이 대만에서의 노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일본의 고양이섬(마나베쉬마)을 찾았던 때와 똑같은 이유로 담수이와 샹산의 노을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고양이 섬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비함! 그 섬에 들어가 아기 고양이를 만지는 순간, 어느 마녀가 걸어놓은 주문에 몹쓸 저주가 걸린다고 하더라도, 그 섬의 아기 고양이만큼은 꼭 만져야 할 것 같은 묘한 느낌의 충동! 그래서 나는 중독된 것처럼, 대만의 노을을 좇아 다녔다. 대만의 붉은 노을빛은 마치 주술사의 주문처럼 나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하얗기만 하던 나의 마음도, 하늘도 어느새 까맣게 변하여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 감동을 잊지 못하여, 또 다음날 노을을 찾아 떠났다. 그렇게 대만에서의 열흘 중 닷새를 노을을 좇아 다녔다. 입국 날과 출국날을 제외하면, 나는 8일 중 5일을 노을만 찾아다닌 셈이다.


나는 더 이상, 일본의 고양이 섬을 찾지 않는다. 일본의 고양이 섬을 찾지 않아도 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내가 “노을”이라고 이름 붙여준 고양이는 하루 걸러 하루 나를 반겨준다. 나에게는 어린 왕자 속 사막여우와 같은 친구다. 이 친구는 나의 느린 걸음에 맞춰, 나의 바짓단에 자신의 머리를 비빈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그의 배와 등을 긁는다. 나는 이 친구로부터 고된 하루에 대한 위로를 받는다. 위안을 받는다. 나는 이 친구에게 제법 길들여진 셈이다.


내가 더 이상, 대만의 노을을 찾지 않을 날이 올 수 있을까? 한국에서의 노을을 바라보며, 대만에서의 노을을 까맣게 잊는 날이 오기는 할까? 노을을 보면 나는 주문에 걸려 버린다. 나는 보름달의 늑대인간인 셈이다. 나는 노을이 필요하다. 그 노을이 대만의 것이 되었든, 한국의 것이 되었든, 호주의 것이 되었든, 네덜란드, 독일, 일본, 미국, 그 어느 나라의 것이든 상관없다, 나는 나를 위로해 줄, 한 줌의 노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결론은 얼른 퇴근부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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