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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배 May 08. 2021

분실

그 날은 일본인 친구, K가 나의 공연을 응원하러 온 날이었다. 두, 세 곡의 노래에 맞추어 상모를 돌리고는, 숨도 고를 겸 K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다.
“스캇(정배), 이번 브라질 월드컵의 우승은 어느 나라가 할 것 같아?”
“어느 팀이긴 어느 팀이야, 당연히 네덜란드지!”
“에이, 다른 팀이라면 모를까, 네덜란드는 아닐 것 같은데. 그래도 브라질 월드컵인데 개최국인 브라질이 우승하지 않을까?”
“그래도 나는 네덜란드가 우승했으면 좋겠어. 나는 축구게임을 할 때도 네덜란드 밖에 안 고른다고!”


월드컵으로 시작한 우리의 대화는, 결국 이번 주말에 셰어 하우스에서 위닝일레븐(축구 게임)을 같이 하자는 약속으로 마무리되었다. K는 다음에 또 만나자며 작별 인사를 하였고, 나도 이미 충분히 휴식을 취했던 지라 얼른 상모를 돌리고 싶었다.
이렇게 텐션이 올라와 있을 때에는 무조건 <강남 스타일> 노래를 틀어야 한다. 마침,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초록색 신호등을 받고 건너온 보행자들이 있어, 나의 공연에 제법 많은 관객분들이 생겼다.


이 좋은 기세를 몰아 바로 두 번째 곡으로 춤을 추려고 내 핸드폰을 찾는데,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기는 한데, 내 핸드폰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정신이 멍 해졌다.
여자 관객 한 분께서 그제야 나의 상황을 인지하시고는, 내가 춤을 추고 있는 동안 어떤 노인이 내 핸드폰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도 내 짐 꾸러미에서 핸드폰을 집어갔기에 도둑으로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고 했다.


관객 분께서는 그 노인의 인상착의에 대해 알려 주시며, 저쪽 방향으로 갔으니 얼른 그를 쫒으라고 하셨다. 하얀 피부에, 검은 선글라스, 그리고 갈색 모자를 쓴 늙은 남자를!
나는 거의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보행자들의 인상착의를 살폈다. 그러나 거리의 그 어디에도 검은 선글라스에 갈색 모자를 쓴 사람은 없었다. 내가 도둑이었더라도, 선글라스와 모자를 제일 먼저 벗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 거리에서 하얀 피부의 늙은 남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들 중에서 내 핸드폰을 훔친 사람을 알아차리는 일이 어려웠을 뿐이다.


문득 나의 나머지 짐들이 떠올랐다. 아까 전 그 여자 관객분께 잠깐 부탁을 하고 범인을 잡으러 뛰어 왔지만, 내 나머지 짐이라고 안전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전속력으로 공연 장소에 돌아왔다. 그곳에는 아까 전의 그 여자분께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 여자분께서는 이 곳 호주 사람들을 대신하여, 미안하다고 전하였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겨 매우 유감이라 하시며, 나의 핸드폰에 재차 전화를 걸어주셨다. 하지만 핸드폰을 훔쳐간 도둑이 그 전화를 순순히 받을 리가 없었다.


얼마를 원하든, 그 금액을 보내줄 테니 핸드폰만 다시 돌려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나 한번 꺼진 나의 핸드폰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두 번 다시 켜지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사진첩의 사진 좀 백업해 둘 걸. 백업이 전혀 되지 않은 나의 사진들이 고스란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 곳 호주에 오고 나서부터 찍은 모든 사진들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된 셈이다. 그게 지금까지도 너무나 아쉽기만 하다. 그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분명 그때 그 당시의 기분과 기억들이 새록새록 선명하게 떠오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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