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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진 Oct 20. 2023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을까?

성장통

    2008년, 나는 서울재즈아카데미 정규과정을 수료했다. 말 그대로 수료만 했다. 모든 전문분야가 그렇겠지만 배웠다고 다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악기 연주는 오랜 시간 부단한 연습으로 체화돼야만 진짜 자기 것이 되는데 재즈의 즉흥 연주를 할 수 있으려면 엄청난 순발력과 빠른 계산 능력도 갖추어야 한다. 수료증을 받고 나니 무엇을 해야 할지 더 막막했다. 어떤 교육기관이든 돈을 낸 만큼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뿐 졸업 후의 진로는 책임지지 않는다. 


    나 스스로 프로 연주자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었다. 다른 연주자에게 먼저 밴드 활동을 하자고 할만큼 내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배운 것으로 당장에 돈벌이를 할 수 있는가? 역시 확실하지 않았다. 필드에서 유명해져 개인 앨범도 내고 콘서트를 하는 연주자도 있지만 막 아카데미를 졸업한 나 같은 풋내기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나이가 20대 후반에 가까워지니 동갑내기 친구들은 하나둘 취직했다. 철없이 꿈만 꿀 때가 아니라 현실을 생각할 나이가 됐는데 나는 여전히 용돈벌이도 못 하는 어쭙잖은 ‘딴따라’라고 생각하니 우울했다. 아들을 이기지 못해 학비를 내줬던 어머니에게도, 남자친구에게 재능이 있다며 물심양면으로 응원해줬던 여자친구에게도 면목이 없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무렵, 한 선생님의 소개로 서초동에 있는 코***악기사에 취직하게 됐다. 면접을 봤던 사장님과 팀장님은 모두 나의 피아노 실력에 흡족해했다. 새로 출시되는 악기를 시연하거나 영문 매뉴얼을 번역하고 마케팅 업무를 보는 일을 맡게 됐는데 기억에 월급도 나쁘지 않았다. 당장 돈을 벌면 생활고를 해결하고 여자친구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도 하며 사람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하루도 출근하지 않았다. 군 제대 후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어렵게 마음먹은 이유가 악기사에 취직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식출근 전 이런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나는 회사에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나에게 찾아온 취직의 기회마저 차버렸다. 나는 여전히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했다. 한국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던 나는 마땅히 의지할 곳도 없었다. 내가 대학 중퇴의 학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영어학원 파트타임 강사였다. 오후 몇 시간만 가르치면 됐기 때문에 오전과 저녁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음악 공부나 밴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원어 수업이었기 때문에 파트타임 치고는 보수도 좋았다. 그렇게 나는 ‘이** 토킹클럽’의 강사가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파트타임이라고 해도 처리할 업무가 많았다. 그 학원에서 인기 있는 강사가 되다 보니 방학에는 특강까지 맡게 됐고 생각보다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상대하다 보니 퇴근하면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또 그렇게 음악과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연주 활동을 하면 낮아진 자존감을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인이나 새로 알게 된 사람들과 함께 어쭙잖은 밴드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실력도 늘고 자연스럽게 인디밴드 연주자나 재즈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를 통해 ‘MIDI’라는 것을 우연히 접하게 됐다. 컴퓨터로 뚝딱거리면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신기했다. 피아노 연습이 우선이었지만 틈틈이 컴퓨터 음악에 재미를 붙였고 작은 장비부터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작곡가가 되는 길이었다는 것을 당시에는 몰랐다.


    어떻게 하면 재즈피아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가깝게 지냈던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고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그분께 레슨을 받기로 했다. 레슨을 위해 홍대거리에 갈 때면 나는 곳곳에서 음악 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기타 가방을 메고 있다고 모두 실력자는 아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음악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웠고 나는 조급해졌다. 그때 홍대에서 악기점을 운영하던 어떤 형을 알게 돼 종종 그곳에 들렀는데 매장을 방문하는 손님 중에는 꽤 유명한 뮤지션도 있었다. 그런 무리에 섞여 있다 보면 잠시 내가 뭐라도 된 것처럼 마음이 들떴지만 이내 자괴감이 들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연습에만 집중하려고 애썼다.


    선생님과 나는 정서적으로 잘 맞았다. 훗날 나도 음악을 가르치며 알게 됐지만, 레슨에는 지식 전수뿐만 아니라 학생의 고민을 상담하는 일도 포함돼 있었다. 선생님은 훌륭한 상담가였고 나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쌀쌀해지던 가을 어느 날 선생님은 나에게 실용음악대학에 입학하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실력도 부족한데다 28살에 무슨 대학 입시냐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 이내 선생님의 흔들림 없는 진지한 눈빛을 보았다.


    “너, 잘해.”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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