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음악
나는 서울 대학로에 있던 서울재즈아카데미로 향했다. 오랜만에 필리핀에서 입국한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제대 후 당장에 내 능력으로는 등록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야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멀쩡한 ‘인 서울’ 4년제 대학을 그만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다시 음악을 하겠다고 말씀드리면 걱정할 것은 불 보듯 훤했다. 나는 어떻게든 어머니를 설득하려면 함께 그곳을 방문해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교육부서를 담당하고 있던 선생님은 26살의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려는 나와 어머니의 걱정을 덜어줬다. 늦게 시작하는 만큼 건강하게 오래 살면서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참 단순한 말이었지만 간절하게 음악을 하고 싶던 나에게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어머니는 여전히 걱정하면서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40대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26살은 무언가 시작하기에 전혀 늦은 나이가 아니다. 오히려 실패해도 괜찮은 ‘어린’ 나이로 보인다. 26살부터 시작해 10년 동안 꾸준히 노력했다면 36살쯤 전문가가 되지 않을까? 마흔 살이 된 어떤 분야의 전문가를 떠올려 보자. 경험이 풍부할 것 같고 자기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약하기에 자연스러워 보인다. 40살에 시작한다고 한들 늦을까? 쉽지 않아도 10년의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늦은 나이는 없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울재즈아카데미 재즈 피아노과에 입학했다. ‘갑자기 웬 재즈 피아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클래식 피아노는 어릴 적 몇 개월 배웠을 뿐이지만 나는 청소년 시절 좋아하는 팝송을 카피하기도 하고 독학으로 코드를 공부하며 피아노를 즐겨 쳤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며 줄곧 찬양팀에서 건반 연주자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건반 연주에 늘 관심이 많았다. 좋아하는 기타로 실의에 빠졌던 나는 재즈 피아노로 새롭게 출발하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배우기 시작한 재즈는 난이도가 상당했다. 듣도 보도 못한 코드와 보이싱 이론, 테크닉까지 내가 생각하던 수준의 음악이 아니었다. 나는 재즈 연주자 한 명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입학했는데 다른 학생들은 이미 재즈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갖췄을 뿐만 아니라 밴드에서 활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입문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클래식 작곡이나 피아노를 전공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코드만 보고 연주하던 습관 때문에 초견*이 상당히 약했는데 그 친구들은 처음 보는 곡도 곧잘 연주했다. 모든 게 생소하고 어려웠는데 커리큘럼은 따라가기 힘들 만큼 빠듯했다. 당시 재즈 피아노과 학과장이었던 선생님은 엄격하기로 유명했는데 배운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하지 못하면 모두가 있는 앞에서 망신을 줬다. 설렘으로 시작했던 재즈 피아노를 향한 열정은 점점 스트레스로 변했고 자존감은 날로 낮아졌다. 설렁설렁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초견이란, 처음 본 악보를 연습하지 않고 연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