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 난치병 환자의 절망
하루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왼쪽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가 이상하게 저릿했다. 오래 앉아있어서 그런가 하고 일어나서 돌아다녀 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통증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심해지자 나는 불길한 예감을 안고 집에서 가까운 분당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복부 CT를 찍어보니 아래쪽 경막이 주머니처럼 늘어나 있다고 했다. 뇌와 척수를 둘러싸고 있는 뇌막은 3겹으로 되어 있는데 이 중 가장 바깥의 막이 경막이다. 내가 가진 질환인 마르판 증후군의 흔한 증상 중 하나라고 했다. 약해진 경막이 중력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쪽으로 늘어나 경막류를 형성한 것이었다. 나의 경우 경막류가 두 군데 생겼고 각각의 지름이 10 센티미터를 훌쩍 넘는다고 했다. 이렇게 사이즈가 큰 경막류가 있으니 다리로 내려가는 신경을 눌러 통증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현재로선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견디기 힘들 때마다 먹으라고 진통제를 처방해 주셨다. 그날은 나 혼자 진료를 간 날이었다. 진료를 마치고 수납을 하기 위해 대기하려고 빈자리에 털썩 앉았는데 그제야 방금 들은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방법이 없다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심장 진료를 보고 있는 아산병원을 가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늘어난 경막을 묶는 수술이 있지만 경막이 워낙 얇아 찢어질 수 있다고 권하지 않는다고 진통제를 먹기로 했다. 그렇게 무수히 병원을 다녔으면서 방법이 없다는 말은 사실 처음 들어 보았다.
그동안은 문제가 생기면 병원에서 어떤 조치를 취해주었다. 심장의 판막이 망가졌으면 인공판막으로 교체해 주었고, 대동맥이 늘어나면 인공대동맥으로 교체해 주었다. 수정체가 탈구되어 시력이 0.2도 안 나오던 것은 인공수정체 수술 후 교정시력이 1.0까지 좋아졌다. 물론 어마어마한 수술들이었으나 수술하고 나면 어쨌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런데 늘어난 경막이 신경을 누르는 이번 상황은 해결방법이 없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은 것이었다.
통증은 생명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지만 환자의 삶의 질과는 가장 밀접한 문제이다. 통증이 있으면 그 부위가 신경 쓰여 다른 일에 정신을 집중하기 힘들다. 마음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상태가 된다. 당시 나는 오전에 통증이 시작되어 자기 전까지 이어지곤 했는데 앉아 있는 시간이 특히 힘이 들어 무엇도 집중력 있게 해낼 수가 없었다.
내 나이는 고작 20대 초반이었다. 살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평생 통증을 안고 살아야 한다면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어졌다. 그전까지 나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환자였다.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은 내가 힘든 수술도 담담하게 견뎌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고칠 수 없다는 말은 내 믿음을 산산조각 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믿음을 뺏겨버린 환자는 머리카락이 잘려버린 삼손이 힘을 잃듯 희망을 잃었다. 절망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경통은 ‘기분 나쁜 통증’이라는 표현이 딱이었다. 근육통이나 관절통과는 다르게 매우 깊숙한 곳이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신경이 눌리면서 허벅지 후면의 감각도 둔해지기 시작했다. 둔해지는 감각과는 반대로 마음은 예민하게 변해갔다. 진통제를 한 알을 먹어보니 약 서너 시간 동안 극심한 통증은 잡혔다. 다만 통증이 없을 때와 같이 좋은 컨디션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불편한 느낌이 왼쪽 엉덩이 밑에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아프기 시작하면 진통제를 한 알 더 먹었다. 평상시 같았으면 견디어 냈을 정도의 불편함이었지만 끝이 없다는 생각에 나는 점점 지쳐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