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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맨오브피스 Dec 11. 2022

점점 강제성이 없다. 좋은 건가?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다.


어릴 때는 아무리 TV를 오래 보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밤 9시에 하는 뉴스부터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TV 보는 시간에 규칙성이 생겼다.


게임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 게임을 하면 시끄럽기에 부모님 눈치를 보며 끌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가서 할 수 있는 게임 활동이라고 해봤자 친구들과 게임 이야기를 하는 정도였다. 아니면 게임 잡지를 서로 돌려보다가 선생님에게 뺏기던가.


쇼핑에도 제한이 있었다. 해외 직구라는 것이 어렵기도 했고, 많은 쇼핑이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졌다. 재고가 없거나 가게가 문을 닫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날에 다시 찾아가 사도 되지만, 기다리는 사이 사고 싶은 충동이 사그라들곤 했다.


먹는 것도 비슷했다. 부모님 세대보다는 훨씬 풍요로웠지만, 요즘 수준으로 커피&디저트 문화가 발달한 시대는 아니었다. 기껏 먹어봤자 과자나 아이스크림 정도였다. 혈당 수치를 급격히 높이는 바닐라 라떼 같은 음료를 입에 달고 사는 경험은 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강제적으로.


예전에는 건강에 무지했어도 (다행히) 물리적 한계로 인한 강제성이 있었다. 무질서하게 살았지만, 그 강제성 덕분에 내 몸과 정신이 생각보다 많이 파괴되지는 않았다. 허나, 지금 사회는 그런 강제성이 많이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문화와 정보가 널리 퍼져있지만, 동시에 건강을 파괴하기 위한 인프라도 훌륭하게 갖춰져 있다. 그리고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며 편리하게 넘어간다.


내가 내리는 모든 선택이 고민과 신중함을 담고 있지 않다. 일상의 선택은 충동적으로 내릴 때가 많다. 의식하지 않으면 어느새 스마트폰과 기름진 음식으로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다. 돈도 거의 들지 않는다. 나의 시간, 신체, 정신이 그 값을 대신 치를 뿐이다.


강제성이 있는 환경과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환경 중 어느 것이 좋은지는 모르겠다. 누구의 책임을 묻거나 탓하기도 애매하다. 그냥 어느새 그런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별개로, 나의 의식은 내가 챙겨야 한다. 나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충동적 쾌락을 추구하지 말 것을 내가 의식적으로 행해야 한다. 그 누구도 나를 강제할 사람은 없고, 사회가 나의 건강한 삶을 대신 챙겨주기에는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한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살펴주는 것은 무척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 귀찮고 힘들지언정, 내가 나를 효율적으로 챙기는 것이 가장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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