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의 책상은 사무실 중앙에 있었다. 여러 개의 책상이 모여 하나의 섬을 이루었고, 그 섬들이 다시 여러 개 모여 있는 구조였다. 책상과 의자 모두 이케아 제품이었다. 이케아 월드를 보니 유럽에 온 것이 확실했다. 파티션이 없어 개방감과 혼잡함이 동시에 들었다. 모두가 모두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조금 시끄럽기는 했지만 다들 그런 느낌을 즐기는 것 같았다. 각자 맡은 업무는 다르지만 한 배에 탄 느낌이었다. 대신 전화할 때만큼은 사무실 구석이나 빈 미팅룸으로 이동했다.
유리로 된 여러 개의 미팅룸을 지나치면서 안을 훔쳐보았다. 회의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치면 그들은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모든 사람의 눈에 쌍꺼풀이 있는 게 신기했다. 가장 큰 미팅룸 벽에는 직원들의 사진과 각자의 국적을 나타내는 국기가 붙어 있었다. 얼마나 다국적인 회사인지 뽐내는 장식이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많은가 적당히 훑어보다가 부엌 쪽으로 향했다. 독일 국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는 큰 냉장고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꺼내 먹을 수 있도록 과일 주스, 에너지 드링크, 물, 우유, 맥주로 꽉 채워져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맥주가 들어 있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무실 냉장고에 왜 맥주가 있는거야?"
인사 담당에게 물으니 그녀가 대답했다.
"있으면 어때."
그렇다. 있으면 안 될 이유가 없으면 있어도 되는 것이다. 냉장고 옆에는 커피머신과 믹서기가 놓여 있었고, 싱크대 옆에 세워진 도마가 눈에 띄었다. 가끔 점심을 요리해 먹는 직원들이 있어서 구비해 놓았다고 한다. 도마보다는 맥주에 더 흥미가 갔다. 자세히 살펴보니 칼스버그 같은 대기업 맥주부터 베를린 로컬 맥주까지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에어컨이 없는 사무실은 의외로 시원했다. 베를린의 건물 대부분에는 에어컨이 없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대충 버틸 만해서다(기후 변화가 심해지면서 달라지고 있기는 하다). 한국보다 낮은 습도와 독일의 삼중 유리창이 큰 역할을 한다. 에어컨은 없었지만 선풍기 한 대가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구석에서 열심히 회전하고 있었다. 그 반대쪽은 휴게실이었다. 빈백 소파, 안락 의자, 테이블 축구, 탁구대가 놓인 방이었다. 일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거나, 그저 일하기 싫은 사람들이 모여 쉬고 있었다.
인사 담당은 이것으로 사무실 투어는 끝이라며 내 책상으로 안내해주었다. 아까 본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구석'이었다. 내 책상이 위치한 섬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부 빈 자리였다. 그녀는 다들 어디로 간 모양이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사무실 투어를 해 줘서 고맙다고 말한 뒤 자리에 앉았다. 노트북에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이메일을 확인하며 섬 동료들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결국 끝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적당히 눈치를 보다 퇴근했다.
퇴근길에는 아침의 고집을 버리고 트램을 탔다. 역 근처에서 저녁밥으로 먹을 케밥을 샀다. 집주인 부부에게 다녀왔다고 인사를 한 후, 내 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꺼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다. 일단 미팅이 많을 것이다. 읽어야 할 문서도 쌓여 있을 것이다.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습득할 수 있느냐가 초반 포인트였다.
식어가는 케밥을 우적우적 씹으며 내일 할 일을 정리하던 중 메일이 한 통 왔다. 내가 몸담게 된 사내 스타트업의 로고가 정해졌다는 내용이었다. 첨부된 로고 파일을 열었다. 둥글둥글한 글씨체로 회사명이 쓰여 있었고, 그 오른쪽엔 여러 개의 네모가 그려져있었다. 독일에 오기 전에 내가 투표한 파란색 로고와 생김새는 같았지만 색깔이 달랐다. '신뢰감을 주는 파란색'이 표를 압도적으로 많이 받았지만, 막판에 대표가 보라색으로 결정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IT업계에 파란색은 너무 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럴 거면 투표는 뭐하러 했나 싶었지만, 대표가 그렇게 정했다니 불만은 없었다. 이제 우리는 퍼플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