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첫 출근 날은 동시에 이사 날이기도 했다. 아침 일찍 한국인 부부 집에 들러 짐을 가져다 놓고 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쨍한 태양빛에 푸른 잎사귀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날씨에 감탄해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구글맵으로 사무실까지 걸리는 시간을 확인했다. 걸어서 30분. 시간도 넉넉하니 걸어서 출근하기로 했다.
베를린의 여름 아침은 정말 그림 같다. 여름에 관광객이 몰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림 같은 도시 풍경 속에서 출근하고 있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그림은 눈으로 보라고 있는 거다. 한 10분쯤 걸으니 뜨거운 햇살에 타 죽을 것 같았다. 한국처럼 습하지 않은 대신 태양이 심하게 뜨거웠다. 적당히 걷다가 트램을 타면 될 것을, 나는 이 그림 같은 여름 날씨를 온몸으로 즐겨야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등에 땀이 차기 시작했고 청바지는 따끈따끈 데워졌다.
걸어서 사무실 건물에 도착하니 이미 일 할 컨디션이 아니었다. 땀도 나고 머리도 지끈거렸다. 나는 왜 트램을 타지 않았을까. 스스로의 미련함을 반성했다. 그래도 도착은 했으니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적당한 긴장감을 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올라가 보니 접수 데스크는 따로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냉장고가 보였다. 아무나 꺼내 마실 수 있게 물병이 여러 개 들어 있었다. 한 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시자 너무 시원해 정신이 확 돌아왔다. 입 안에서 터지는 탄산이 느껴졌다. 냉장고에 아무렇지도 않게 탄산수가 있다니 베를린에 온 게 맞구나 하고 새삼 실감이 났다.
관광객처럼 두리번거리며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본사 동료들이 보였다. 여러 명과 포옹으로 반가움을 나눴다. 스카이프 화면으로만 보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니 신기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과는 악수로 인사한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니 긴장이 풀렸다.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우크라이나, 미국, 베트남, 러시아 등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일하고 있었다. 다양한 억양의 영어를 듣고 있으려니, 나는 진짜로 베를린에 일하러 온 것이구나 하고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웰컴 투 베를린!"
뒤돌아보니 이메일로만 이야기를 나눴던 인사 담당이었다. 그녀가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한쪽 손에는 서류 뭉치가 든 폴더를 들고 있었다. 아마도 나의 근로계약서일 것이다. 그녀는 나를 빈 미팅룸으로 안내했다. 대화는 날씨 같은 뻔한 주제로 시작되었다가 이내 근로계약서로 옮겨갔다. 그녀는 폴더에서 근로계약서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곧장 맨 뒷장으로 종이를 넘겼다. 하얗고 빳빳한 종이의 감촉이 좋았다. 서명란에는 대표가 이미 서명을 해놓은 상태였다. 내가 서명만 하면 이 계약은 체결되는 것이었다.
서명하려고 펜을 꺼내는데 인사 담당이 서명하는 법을 설명해줬다. 독일에서는 계약서에 서명뿐만 아니라 서명이 이루어진 도시와 날짜도 적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표의 서명을 힐끔 엿본 후, 나의 서명란 위쪽에 [01.08.2014 Berlin]이라고 쓰고 그 아래에 서명을 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각자 계약서를 한 부씩 챙겼다. 그녀는 사무실을 구경시켜주겠다며 미팅룸 문을 열었다. 미팅룸 문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손자국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소독용 알콜을 뿌려 깨끗이 닦아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