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의 연말

by 맨오브피스

여름에 베를린에 왔다. 출근하고, 일하고, 파티하고, 게임하고, 또 일하다 보니 금새 12월이 되었다. 베를린의 겨울은 어둡다. 아침 9시쯤에 해가 뜨고 오후 5시가 넘어가면 어둑어둑하다. 공기가 습해 으실으실하다. 거리에 간판이 많지 않아 휑함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퇴근길을 조용히 걷다 보면 괜히 쓸쓸해졌다. 술은 가끔만 마셨다.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지냈다. 어두운 창밖을 보면서 차를 마시고 있으면 어딘지 겨울이 운치있게 느껴졌다.


12월 중순에 한국 친구 두 명이 베를린으로 놀러 왔다. 주말마다 함께 게임을 했던 유학생 친구가 영국에서 날아왔고,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동창이 날아왔다. 나는 그들이 오는 날짜에 맞춰 휴가를 냈다. 같이 먹고 자며 며칠을 놀았다. 요리를 잘하는 동창은 밥을 했고, 미술 전공인 유학생 친구는 나에게 그림을 그려 선물해 주었다.


셋이서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고 큰 소시지가 들어간 브라트부어스트와 따뜻한 글루와인을 먹었다. 부른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알람을 맞춰 놓고 일찍 잤다. 당시 셋이서 함께 즐기던 휴대폰 게임이 있었다. 알람은 그 게임에서 던전이 열리는 시간에 맞췄다(주로 새벽 시간이었다). 알람이 울리면 셋 중 한 명이 일어나 나머지 둘을 깨웠고, 우리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던전을 깼다. 친구들과 낄낄대며 노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베를린은 점점 더 조용해진다. 크리스마스는 유럽 최대의 명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맞춰 1~2주씩 휴가를 낸다. 저가항공을 타고 고향으로 날아가 가족들과 연말을 보낸다. 한국의 귀성 현장이 고속도로에 있다면, 유럽의 귀성 현장은 공항에 있다. 유럽 친구들은 택시비를 아낄 목적으로 삼삼오오 그룹을 만들어 같이 공항으로 향한다. 폴란드처럼 베를린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거리라면 버스로 이동하는 이들도 있다. 나처럼 고향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외국인들은 사무실에 남았다. 인산인해로 아수라장이 된 공항 사진이 페이스북에 올라올때면, 나는 지그시 좋아요를 눌렀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매출 모니터링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다. 구글 같은 대기업을 포함해 수많은 회사들이 소프트웨어 코드를 수정하지 않는 코드 프리즈(Code Freeze) 기간을 갖는다. 크리스마스가 명절이 아닌 아시아권이면 몰라도, 적어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모든 것이 멈춘다. 아무도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광고 노출은 세팅 값에 맞춰 컴퓨터가 알아서 한다. 매출은 예상되는 오차범위 안에서 발생한다. 계속 이렇게 쭉 영원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물론 그럴 일은 없지만).


퍼플팀의 12월 매출은 목표했던 것보다 높았다. 연말에 광고가 많이 들어오는 덕분이었다. 얼마까지 올라가나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모니터링은 집에서 해도 충분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일했다. 나도 그랬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 통화를 했다.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가끔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아(아마도 공유기가 문 밖에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모자이크를 한 것처럼 영상이 일그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국제전화요금 걱정에 벌벌 떨며 1분 안에 용건만 간단히 말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바싹 마른 빨래를 개며 덕순이와도 영상 통화를 했다. 안부를 묻고, 한국과 베를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당시 한국에선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베를린은 술 취한 관광객들이 꽤액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덕순이는 남편이 모니터에서 나오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했다. 덕순이가 예정보다 독일에 일찍 와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계획이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원래 일정대로 2월에 오는 것으로 유지했다.


12월 31일 밤.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한 음악을 틀어놓고 창문을 열었다. 창틀에 몸을 기댄 채 밖을 내다보니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송년 분위기에 취한 베를린 젊은이들이 동네방네 불꽃을 쏘고 있었다. 31일의 베를린 길거리는 꽤 위험하다. 불꽃이 말 그대로 사방팔방으로 터지기 때문이다. 유튜브에서 'berlin new year fireworks street'라고 검색해 나오는 영상을 보면, 흡사 전쟁터처럼 보인다. 다치는 사람도 제법 많다. 밤이 깊어가면서 구급차 사이렌도 심심찮게 들린다. 자정이 가까워질수록 불꽃 터지는 빈도가 늘어났다.


자정이 되고 밤하늘이 초 단위로 계속 번쩍거렸다. 아이돌 그룹이 공항에 도착할 때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 같았다. 좀 시끄럽긴 하지만 덕순이와 같이 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요란하던 불꽃놀이는 두 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진정됐다. 덕순이에게 새해인사 메시지를 보낸 뒤 잠을 청했다. 새벽에도 가끔 터지는 불꽃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머릿속으로 불꽃놀이에 취한 가상의 젊은이들을 상상하며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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