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이 처음 살던 곳은 길가에 덩그러니 한 채 놓여있던 집이었다. 집 바로 앞엔 넓은 계곡이 있고, 태풍이 오면 집 앞까지 냇물이 차오르거나, 집 안으로 물이 들어오는 일은 허다했다. 계곡 옆으로 커다랗게 놓여있는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우리는 '소년바구(바위)'라고 불렀다.
내가 7살 때 까지 우리는 소년바구에 살았다.
소년바구에서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같은 동네에 집을 지어 이사를 갔는데, 그곳이 지금의 만수가 만든차 찻집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소년바구를 떠나고 그곳을 많은 사람들이 스쳐갔다.
식당을 했다가, 찻집을 했다가, 민박을 했다가, 셋방이 되었다가. 지금은 친한 지인 분이 독채 펜션으로 운영 중이다.
정택이 아저씨는 아빠보다 대 여섯 살은 많은 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 이미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셨으니 지금은 아마 할아버지가 되었으려나.
"승희야~뭐꼬. 아저씨가~ 소년바구식당을 할건데~냉면을 만들 거야. 회냉면 하고 아바이순대랑 오징어순대 묵으러 온나."
아저씨가 해주신 회냉면에 들어간 회는 매콤하기보다는 달짝지근한 황태채 같았다. 오징어순대와 아바이 순대도 그때 처음 먹어보았다. 분식집에서 파는 순대가 아닌, 그렇게 알이 꽉 차고 맛있는 순대는 아마 평생 없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강원도에 여행을 갔을 때 정동진 바닷가 앞에서 오징어순대를 파는 걸 보았다. 그걸 보고는 어릴 때 정택이 아저씨가 만들어 주신 오징어순대가 생각나 냉큼 사 먹어보았지만 맛이 별로였다. 언젠가 홈쇼핑에도 오징어순대가 나와 충동구매를 해보았지만, 역시나 아니었다.
아저씨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고도 흐릿하다.
아저씨는 경상도 사람인지, 전라도 사람인지, 서울 사람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말투는 느릿한데 목소리는 서울 사람처럼 부드럽고 경상도 사투리를 섞어 썼던 것도 같고. 분명 결혼은 안 했지만, '박서울'이라는 아줌마가 여자 친구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실지 궁금하다.
냉면집 오픈 빨도 잠시, 아저씨의 소년바구 냉면집은 그 당시 인적이 드문 화개 산골에 있어 몇 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지금 화개는 관광지로 자리 잡아 관광객이 많이 오는 편이다.)
그러고는 아저씨에 대한 기억이 없다.
박서울 아줌마와 서울로 가셨는지 어쨌는지 모른다.
아빠와 형님 동생 하면서 한때 되게 우리 가족과 친했던 정택이 아저씨.
쌍꺼풀이 없는 찢어진 눈에 흰머리가 검은 머리 사이사이 있어 지금도 얼굴이 뚜렷이 기억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앞에는 함흥냉면 집이 있어 가끔씩 그곳에서 회냉면을 먹곤 한다. 회냉면을 먹을 때마다 아저씨가 했던 소년바구 식당에서의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
아저씨가 처음 만들어 주셨던 '아바이 순대'도 아바이가 아저씨라는 뜻이라던데, 꽉 찬 순대 안에 총총 한알씩 완두콩이 들어있었다. 그때 참 맛있었는데. 회냉면의 회를 순대위에 올려서 한입에 넣으면 세상 가장 행복했다.
언젠가 정택이 아저씨께서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하동으로 한번 오시라고 하고 싶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연락은 왜 안 된 건지, 건강하신지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