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고등학생일 때, 토요일이면 백일장에 가곤 하였다.
첫 백일장은 우석대학교 백일장이었는데 그때 상을 하나도 타지못한 것이 분해서 고등학교 3년 내내 백일장이며 공모전이며 뛰어들어 잠시나마 글쟁이의 꿈을 꾸기도 했었다.
당시 우석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엔 '너에게 묻는다'로 유명한 안도현 시인과 곽병창 극작가, 정양 시인 등이 계셨다. 특히 안도현 시인을 보기 위해 오는 학생들도 제법 있었다.
안도현 시인은 당시 전라북도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기에 지역에서 있는 백일장엔 줄곧 심사위원으로 참가하곤 하였다. 그래서인지 안면을 많이 트게 되었고 안도현 시인은 매일 혼자 참가하는 나를 보며 'OO고 독립군'이라고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안도현 시인과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되고 지역 내에서 나름대로 상도 많이 타는 학생 중 한 명이 되었는데 이상하게 안도현 시인이 심사위원인 대회에서는 장려상 하나 타보지를 못했다. 어린 마음에 그게 분해서였을까.
안도현 시인에게 내 습작시를 정리하여 뭉터기로 보냈다.
3일 정도 지났을까. 안도현 시인은 약 60편이 넘는 습작시에 대해 일일히 느낀 점을 달아 보내셨다. 아래는 그 답장 메일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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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준아,
시 잘 읽었다.
그런데 심히 괴로웠다는말을 먼저 해야겠구나.
시라기보다 어떤 별 의미 없는 중얼거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몇 가지 느낌을 적는다.
1. 시를 많이 쓰려고 하지 말고 다른 시인들의 시를 더 많이 읽어라. 적어도 다른 시인들의 시를 100편을 읽은 뒤에 너의 시 1편을 써라.
2. 백일장 같은 데 나가서 시로 상을 받고 싶거든 요 몇 년간 각종 대회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다 모아서 읽고 너의 시와 비교해 보거라.
3.시를 쓴다는 생각보다 시를 '새긴다'는 각오로 써라.
4. 참고로 내가 고등학교 때 쓴 시들을 첨부한다. 너의 시와 비교해 보아라. 너의 시가 너무 늙은 거 아닌가?
5. 건강해라. 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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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본 파일에는 안도현 시인이 고등학교 때 쓴 시와 그때의 기억을 적어둔 것들이 있었다. 저 이후로 나는 여러 생각을 해 보았다. 이미 저 메일을 보낸 시점에서도 전국단위 대회에서만 스무개 이상의 상장을 가져왔고 장관상도 타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별 의미없는 중얼거림이라니!
어린 나이에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고선 이후로는 상을 타고싶다는 마음을 버렸다. 새긴다는 마음으로 시를 쓰기에 상을 탐내는 것은 너무 욕심이 많아보였다. 그래서 저 메일을 받은 이후로는 나의 기억을 박제하는 용도로 시를 쓰곤 했었다.
나이가 들어 사회에 나오고 일을 하면서도 비슷한 감상을 받을 때가 많다. 주어진 일에 대해 내 업무 역량을 넘어서는 일들이 생기곤 한다. 분명 내 연차와 능력은 주니어인데 주어지는 업무는 시니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근데 그렇다고 주니어가 시니어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욕을 조금이라도 덜먹기위해 일로 나를 덮을 뿐이다.
주니어에겐 주니어에게 맞는 일이,
시니어에겐 시니어에게 맞는 일이 있다.
나이에 맞는 글이 있는 것처럼.
나는 아직 주니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