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D대학교 4학년 신지훈입니다. 한 달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선배를 다시 만날 줄은, 아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대학 3년에 했어야 할 현장실습을 아르바이트로 정신없는 사이에 놓치고 4년 때 겨우 신청했다. 그것도 이미 인원이 다 차서 마감됐던 곳에 사정사정해서 추가인원으로 들어갔다. 인원미달인 다른 실습기관이 있기는 했지만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현장실습은 방학기간을 이용해 진행됐다. 내가 택한 곳은 종합복지관으로 한 건물에 여러 기관이 있어 다양한 경험을 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사실, 나에게 있어 현장실습은 '이론으로만 접했던 일들을 직접 하게 된다니, 이런 멋진 기회가!' 라며 설레는 기분이 아닌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가기를...'라며 무릎 꿇고 기도해야만 하는 부담이었고 두려움이었다.
입학당시만 해도 꿈에 부풀어있었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다는 게 그 무엇보다 멋진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그저 이론은 이론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군다나 인간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겉으로는 웃으면서 등뒤로는 칼을 들고 있는 걸 보며 환멸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에게 대학 4년은 그저 졸업할 때까지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는 어둠 속에 잠긴 터널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현장실습은 안 하고 싶었다. 어차피 졸업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릴 학문이었다. 정확하게는 이 고통과 환멸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친절의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할 나 또한 가증스러웠다. 그렇다고 자퇴를 하거나 전과를 할 용기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학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과 쓸데없는 생각 말고 졸업해서 취업이나 하라는 교수님의 시퍼런 칼날 같은 조언이 뇌리에 맴돌았다. 휴학도 고민했었다. 하지만 휴학이 답은 아니었다. 어쩌면 고통 속에 나를 내버려 두고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이 또한 지나가는 시간이다...' 주문과도 같은 말만 되뇔 뿐이었다.
그런 곳에서 그 선배를 마주했다. 놀랐다. 그것도 아주 많이.
복학을 했었나 보다. 언제 했을까. 아무리 말해주는 입이 없어도 듣는 귀는 있는데,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와중에 아는 얼굴이라고 반가웠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어찌나 밝고 목소리가 큰지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책상아래로 꽉 부여잡고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D대학교 4학년 유혜정입니다. 반갑습니다."
내 소개를 했는데 왜 다들 놀란 눈으로 그 선배를 쳐다보는 걸까. 같은 대학이라 그렇겠지. 하필 그 선배 반대편에 앉아 시선처리가 영 어색했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역시나 그 선배 주위로 실습생들이 몰려들었다.
"지훈 오빠. 아,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하하, 편한 대로 하세요."
"지훈 오빠, 여자친구 있어요?"
요새 친구들은 참 적극적이다. 처음 본 사람에게 대뜸 오빠라고 불러도 되냐느니, 여자친구 있냐느니, 나 같으면 구석에 박혀서 눈과 귀만 열어놓을 텐데 말이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구석에 박혀서 눈과 귀만 열어놓으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다.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아 집에서 연습한 사람 좋은 미소로 인사에 답했다.
"동갑인데 말 편하게 해요, 우리."
"아, 네. 아니, 응."
"아까 소개는 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기억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안녕, 난 이현정이라고 해."
"나는 유혜정."
선하고 귀여운 인상의 친구였다. 그녀는 나를 데려가 자신의 친구들에게도 소개해줬다. 선한 기운을 가진 사람들은 다 그런 친구만 사귀는 건지, 그녀들과 함께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시간이 참 달큼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대뜸 누군가 내 어깨를 휙 돌리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언니, 지훈 오빠랑 친해요? 같은 학교잖아요."
"네?"
"야! 그렇게 물어보면 어쩌는데. 실례잖아."
"아 왜! 아씨. 안녕하세요 언니. 전 이채은이라고 하는데요, 지훈 오빠랑 친해요?"
"아니요."
"하긴. 그래도 같은 학굔데 지훈 오빠에 대해 아는 거 없어요? 여자친구는요? 어떤 스타일 좋아해요?"
"...안 친해서 잘 몰라요."
이거나 저거나.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무례하기 짝이 없게 굴던 그녀는 지훈 선배에게 유독 적극적으로 들이대던 여자였다. 꼴을 보니 선배와 같은 학교인 나에게 정보를 얻으려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고, 그녀는 짜증 나 죽겠다는 듯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지훈 선배를 잘 안다고 해도 너한테는 모르는 사람일 거다.
그렇게 첫 실습날은 자기소개와 프로그램 일정 공유로 끝이 났다. 비교적 수월한 하루였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본격적인 실습에 앞서 둘 혹은 셋이 조를 짜는 날이었다. 먼저 인사했던 사람들은 이미 셋이 친구이기에 그렇게 조가 짜일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생각만 해도 숨이 차고 식은땀이 흘렀다.
"음, 이건 실습이니까 친한 사람들끼리 조하는 거 말고, 제비 뽑기로 결정할게요."
다행이었다. 실습담당자는 미리 준비해 놓은 제비 뽑기 상자를 가져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한 사람씩 구멍에 손을 넣고 종이를 꺼냈다. 무례한 여자무리 말고 아무나 돼라, 속으로 빌고 빈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진 건지 같은 번호를 가진 사람은 어제 다가와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준 현정이었다.
"같은 조네. 잘 부탁해!"
"응. 나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자신을 '이채은'이라고 소개한 무례한 그녀는 못생겼다고 근처에도 가기 싫다며 뒷담화한 남자 실습생과 짝이 된 것 같았고, 지훈 선배는 현정의 친구 중에 한 명과 짝이 된 것 같았다.
그렇게 조 편성이 끝나고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다. 종합복지관이다 보니 식당이 꽤 넓었다. 배식을 받고 한 줄로 길게 늘어진 테이블을 쭉 훑어봤다. 나는 그중 가장 끝자리로 향했다. 식사만이라도 조용히 하고 싶었다. 뒤이어 오는 실습생들이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저들끼리 수군거리다 테이블 중앙에 자리 잡고 앉았다. 편하게 혼자 먹겠다는 게 그리 이상한가? 흥! 수군거리는 게 거슬리긴 했지만 내가 의도했던 바니 상관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짧은 감사인사를 하고 한술 뜨려는데 내 앞에 음식이 푸짐히 담긴 식판이 놓였다. 그리고 들리는 중후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
"같이 먹자."
그런 느낌이었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그랬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에 크레디트가 천천히 올라가는 것처럼 내 시선은 식판의 주인에게로 천천히 올라갔다. 모두에게 하는 가식적인 미소하나 없이 무표정인 듯 아닌 듯 미미하게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나의 대답은 굳이 안 들어도 된다는 듯 그렇게 내 앞자리에 앉았다. 어딘지 모르겠으나 내 어디선가 지진이 일었다. 머리인가, 가슴인가, 아니면 손인가 발인가. 아, 동공일 수도 있겠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알 수가 없다. 미세하게 입꼬리를 떨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씹었을 수도 있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게 밥한술을 크게 떠 입속으로 넣었다. 난 방금 떠 넣었던 밥을 다시 한번 떠먹었다. 입안에는 은근하게 달짝지근한 흰쌀밥만이 가득했다.
"....난 너 아는데."
"네?"
선배는 계란말이를 집어 들며 눈썹을 씰룩였다.
"난 너 안다고."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와 서운한 빛을 내뿜는 눈빛에 지진이 난 곳이 다름 아닌 내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