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초록한 잎사귀들이 풍성해지는 계절이었다. 관자놀이로 흐르는 땀 한 방울을 손등으로 조심히 닦아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개인과제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 선다는 자체만으로도 긴장이 돼 강의실로 가는 내내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푹 내쉬며 울렁거리는 가슴을 두드렸다. 제발 오늘하루도 무사히 지나가길 바라며 강의실 앞문을 열었을 때, 강의실 뒤쪽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
꿈뻑꿈뻑, 아린 눈을 비비며 그 빛을 다시금 바라봤을 때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본 학과뿐만 아니라 타 학과 남자들에게까지 대시를 받을 만큼 우월한 미모를 가진 여자 동기와 배우로 데뷔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멋짐을 뿌리고 다니는 남자 선배가 나란히, 그것도 다정히 서로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앉아있었다.
"아직도 너희 둘이 사귄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뭘, 선남선녀끼리 잘 만났구먼."
"그러니까! 잘난 것들끼리 만나는 건 좀 반칙 아니냐? 아, 지독한 짝사랑을 끝내야 할 때가 온 건가. 골키퍼가 너무 막강하잖아."
"골키퍼 없어도 오빠는 안 돼요. 내 스타일이 아니라니까?"
"알고 있다고요. 그래서 얌전히 차여드린다고요."
"으, 허세는."
그 둘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나는 강의실에서 제일 구석진 기둥 뒤로 자리를 잡고는 귀를 바짝 세웠다.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는 건 힘들지만 듣는 건 좋아했다. 발표준비를 하면서도 내 신경은 온통 그쪽을 향해 있었다. 학년이 다른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봤는지, 또 어떻게 접근했는지, 누가 먼저 고백을 했는지, 가만히 듣고 있노라니 온몸이 간질간질하면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강의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무리들은 하나둘씩 제 강의실을 찾아갔다. 이제 그 여자 옆에는 그녀의 친구가 앉아 호들갑을 떨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진짜였어? 난 거짓말인 줄."
"내가 뭐 하러 거짓말하겠냐. 아, 주말 내내 오빠랑 술 마셨더니 피곤해죽겠네."
"이야, 결국은 꼬시는 데 성공했구나. 대단하다, 대단해."
"말도 마라. 온갖 기술을 다 써도 안 넘어오더니 술 좀 먹이고 스킨십 좀 하니까 결국은 넘어오더라. 역시 남자들이란."
"자기도 별 수 없었겠지. 네 같은 애가 자기 좋다고 들이대는데 안 넘어오고 배기겠나."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저렇게 예쁜 애도 누군가를 꼬시기 위해 '기술'을 써야 한다는 게 퍽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강의가 시작된 후로도 그들의 대화는 계속됐다. 처음엔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더니 발표가 시작되자 노트에 필담을 나누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할 수만 있다면 필담을 나누고 있는 종이를 뺏어와 읽고 싶을 만큼 그들의 연애담이 궁금했다. 나도 연애를 해본 적은 있지만 어른의 연애는 해본 적이 없었다. 어른의 연애라고 해봤자 별다른 게 있겠냐만은, 적어도 미성년자와 성인의 연애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난 그저 어른의 연애가 궁금했을 뿐이다.
강의가 끝나고 난 책상에 엎어져 울먹거렸다. 역시나 발표를 망쳤다. 교탁으로 나가 정면을 바라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난 왜 이모양일까.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부담스럽고 무서웠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하는 나를 바라보며 킥킥 비웃는 사람들도, 지루하다며 대놓고 하품을 하는 사람들도, 발표자 의상이 저게 뭐냐며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도, 책상 밑으로 손을 넣어 휴대폰을 하는 사람들도 나에겐 모두 악마처럼 느껴졌다.
남모르게 눈물을 훔치다 강의실이 적막으로 가득 찼을 때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쓰레기통 옆에 떨어져 있는 종이뭉치를 발견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종이를 주워 펼쳤는데 노트의 가이드 선과 상관없이 뒤죽박죽 쓰여있는 글자를 보고 그들이 나눴던 필담노트라는 걸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
그 종이 한 장으로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환기되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여기저기 쓰여있는 대화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아, 어른의 연애가 이런 거구나. 난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어. 사실 그렇게 농도 짙은 대화는 없었다. 그저 사귀기로 한 바로 다음날에도 역사는 이루어질 수 있구나, 그 정도만 알았을 뿐이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났을까, 본과 건물 앞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구경거리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싸움구경이라고 했던가, 때마침 등교 중이던 나는 거의 뛰다 싶어 걸어 본과 건물 앞에 도착했다. 큰 소리가 나는 곳은 이미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나는 사람들 사이를 조심조심 비집고 들어가 현장을 직관했다.
"그만하라고! 창피하지도 않나!"
"뭐? 네가 지금 큰소리 칠 상황이가."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다고 하면 끝이가? 내 뒤통수 후려놓고 미안, 달랑 문자 한 통이면 끝이냐고."
"지훈아 진짜 미안하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손 치아라. 처맞기 전에."
여자 한 명과 남자 두 명. 전형적인 삼각관계 구도였다. 어떤 상황인지는 그들의 표정만 보고도 답이 나왔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을 받던 선남선녀의 연애는 사랑과 우정, 그 참혹한 삼각관계에 놓이면서 더럽게 끝이 났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말만으로도 누가 파탄의 원인인지 알 수 있었다. 얼굴값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선녀가 얼굴값을 제대로 한 모양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남자 둘은 휴학을 한 건지 재입대를 한 건지 행방이 묘연했다. 반면 여자 동기는 여전히 꽃미모를 풍기며 학교를 다녔다. 다들 앞에서는 괜찮다, 그렇수도 있지, 라며 다독였지만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는 화장만큼이나 얼굴이 두껍다며 까내리기에 바빴다.
그렇게 1년 6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나는 실습현장에서 지훈 선배를 다시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