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동사:날다) 돈가스. 초등학생 때 줄곧 따라다닌 별명이었다. '돈가스'라는 명칭에 맞게 나는 또래들에 비해 현저히 컸다. 키도 컸고 덩치도 컸다. 그런 나에게 붙은 '나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육을 잘했기 때문에 붙여진 꾸밈말이었다. 육상뿐만 아니라 구기종목, 기초체력 등 운동이라면 다 자신 있었다.
또 하나의 별명이 있었다. 나는 꽃돼지. 정확히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밖에는. '나는'은 알겠는데 '꽃돼지'라니. '돼지'라는 단어가 의아한 건 아니었다. 되려 익숙했다. 내가 어떤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꽃'이라는 부분이 의아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초등학교 졸업식 때에 알 수 있었다. 평소 형제같이 지냈던 남자애였다.
"기찬이가 네 좋아했었디. 몰랐제?"
알턱이 있나. 자그마치 2년을 좋아했었다고 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 아이와는 롤러스케이트를 탈 때, 축구를 할 때, 피구를 할 때, 놀이터에서 놀 때 늘 함께였고, 서로의 집까지 드나들던 편한 친구였으니까. 되짚어보면 왜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기도 하다. 말 그대로 하교 후에도 늘 함께했는데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난 후에도 아무런 대답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그 아이에게 직접 고백을 들은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인기가 제일 많았던 아이였으니 그런 아이가 날 좋아했을 리가 없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졸업식 후 교문을 나서는 그 아이를 붙잡아 '진짜 나 좋아했었나?'라고 물었다. 그 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줍게 웃으며 안녕을 고했다. 그 후에 간간이 들리던 소식으로는 축구부 에이스로 활동하다가 전학을 갔다나 뭐라나.
그렇게 중학생이 된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르게 왕따가 되었다. 정확히는 1학년 1학기 중반쯤에 전학을 온 남학생과 짝이 된 후부터였다. 소위 '좀 잘 나가는' 남학생이었다. 아니,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고 한들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챙겨줘야 하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하루는 늦잠을 자 아침을 굶고 등교를 한 날이었다. 너무나 배가 고파 등교하자마자 매점으로 득달같이 달려가 만두하나를 샀다. 전자레인지에 뜨끈하게 데우고 막 봉지를 뜯었을 때 내 앞으로 새카만 얼굴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아-! 나 하나만 줘라."
"아씨, 저리 가! 네가 사 먹든가."
감히 내 만두를 탐하다니, 그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은 바로 짝꿍 남자애였다. 난 짝꿍의 얼굴을 뒤로 밀어내고 만두 봉지를 팔로 감아 먹이를 지키는 야수의 눈빛을 쐈다. 그 자식이 잘 나가는 뭐든 배가 등가죽에 붙게 생겼는데 어쩌란 말인가. 난 내 만두를 사수하는 게 더 중요했다.
"하나만 줘라. 그럼, 내가 음료수 사 올 테니까 같이 먹자."
"싫거든?"
고개를 숙이고 만두를 입속으로 구겨 넣었다. 곧 출석을 부를 시간이 다가오기도 했지만 짝꿍이 언제 손을 뻗어 만두를 뺏어갈지 불안했다. 그러다 컥컥, 사레가 들렸다. 짝꿍은 욕심부리다 쌤통이라며 웃더니 매점에서 팩음료를 사 와 내 앞에 놓았다.
"가방 줘. 교실에 갖다 놓을게."
"아니야, 아직 5분 남았어. 먼저 가. 워이 워이!"
남은 만두를 또다시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가라고 손짓했다. 사실, 같이 먹을 수는 있었지만 매점 문 앞에서 짝꿍을 기다리는 무리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조금 무섭기도 했다. 짝꿍은 짝꿍이라 편했지만 그 무리들은 불편했다. '일진'이라고 불리는 무리였으니까.
그 이후로 은근한 괴롭힘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왕따가 된 줄 몰랐는데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에게까지 외면당하니 왕따가 됐다는 걸 실감했다. 그래도 짝꿍이 있어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가 다시 전학을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 전학 간다. 오빠 없다고 심심해하지 말고."
"오빠 같은 소리 하네. 가서 사고나 치지 마라."
"안 서운하나. 나는 네 보고 싶을 것 같은데."
"윽! 닭살. 네 추종자들한테나 그런 말 해줘라."
짝꿍의 전학이 아쉽긴 했지만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후폭풍이 완전한 왕따로 이어질지는 몰랐다. 일진 무리들의 언어폭력과 은근한 협박, 신체의 대한 비하와 성적인 놀림. 그들이 나에게 왜 그랬는지 한참을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짝꿍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여학생의 시기질투 때문이었다. '네 따위를 대체 왜? 나보다 네가 나은 게 뭔데! 돼지 같은 년이.' 이 한마디로 무섭다는 소문과는 달리 친근했던 짝꿍의 태도와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됐다. 나참, '고백'이라도 받아봤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렇게 나의 1년, 아니 2년이 친구하나 없이 외롭게 흘렀다.
버티고 버텨 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다. 학교에 남자라고는 남선생님밖에 없는 여고였다. 이젠 눈치 볼 사람도 없고 기죽을 필요도 없고, 천상낙원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랬는데, 왜 또 은따가 되었을까. 이번에는 대체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걸까. 고등학교 3학년 졸업반이 되어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수신번호 '1004'로 문자 한 통이 왔다. 문자내용이 퍽 당황스러웠다.
[이제 졸업하면 더 이상 못 보겠다. 그동안 언니 보는 낙으로 학교 다녔는데 이제는 무슨 낙으로 다녀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마 언니는 영원히 제가 누군지 모르겠죠? 그래서 더 슬프고 눈물 나요. 마지막으로 용기 내서 문자 해요. 직접 얼굴 보고 고백하고 싶었는데 용기가 안 나서 이렇게나마 마음을 고백해요. 많이 좋아했어요. 앞으로도 기억할게요.]
여고에도 사랑은 꽃핀다. 여자에게 문자로 고백을 받았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경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러려니 했다. 물론, 얼굴 보고 고백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지만 적어도 그 마음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친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튼 결론적으로 나는 오해를 받았던 것 같다. 백칠십 센티가 넘는 우월한 키에 매일 감는 게 귀찮아서 짧게 자른 머리카락, 허벅지가 쓸리는 게 아파서 택했던 교복바지와 넓은 어깨 때문에 깡패처럼 보이는 게 싫어 재킷대신 입었던 후드집업, 그저 잘하고 좋아해서 열심히 참여했던 체육수업과 체육대회. 한편으로는 여학생이 좋아할 만한 요소는 다 갖췄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사람을 동경했으니까.
알게 모르게 소문이 났을 것이다. 여학생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보니 그 시절, 호기심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학생들이 꺼내놓은 한마디 한마디가 풍선처럼 커지고 커져 소설 같은 현실이 됐을 것이다. '금지된 사랑'을 손가락질하면서도 궁금해하는 게 사람의 심리니까 말이다.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 게 그리 달갑지는 않았지만, 내가 어떤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해서 속은 후련했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어떻게 보였기에 직접 고백하기를 어려워했을까. 나처럼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처럼 꼬시기 쉬운 사람이 어디 있다고. 뭐,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나의 10대는 그러했다. 이유도 모르게 괴롭힘을 당하고 왕따를 당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자리했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유로 친구도 없이 상처만 가득한 눈물겨운 10대를 보냈다. 과연, 20대는 어땠을까. 10대보다는 성숙했을까.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했던 20대의 그날을 떠올리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