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그린라이트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조약돌 하나.
무슨 뜻이었을까. 선배의 그 말은 하루종일 내 머릿속을 맴돌며 괴롭혔다. 단 한 번도 그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학년도, 수업도 달라 우연히라도 마주칠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안다는 걸까. 아니지. 알 수도 있지. OT라든가, 축제라든가, 하다못해 식당에서라도 봤을 수 있지. 이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날 안다는 선배의 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후로 별다른 말없이 식사를 마쳤다. 내가 그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계속 식사를 이어가지 않았더라면 우린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선배도 그런 내 반응에 머쓱했던지 게눈 감추듯 식사를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식판엔 밥과 반찬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꽤 먹은 것 같은데 누가 더 얹어주기라도 한 듯 그대로였다. 선배가 식당에서 나가자마자 발가락 끝이 저릿해졌다. 목도 뻐근하고 허리도 아픈 것 같았다. 가슴과 턱 그 사이 어딘가에서 머물러있던 큰 숨도 그제야 입 밖으로 나왔다. 점심시간만이라도 편안하고 안락하고 싶었는데, 그른 것 같다.
하루는 혹시 후배가 혼자 밥 먹는 게 안쓰러워서 그런가 싶어 실습하면서 친해진 실습생들과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 할 일을 끝내고 마지막에 배식을 받은 선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와 앉았다. 굳이 왜? 자기들 쪽으로 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추종자들이 있는데, 굳이 왜?
밥 먹는 내내 입이 쩍쩍 마르고 목이 타들어갔다. 선배의 하얀 소맷자락이 내 팔을 간지럽게 스치고 지날 땐 얼마 남지 않은 침마저 눈치 없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그 와중에도 내 코는 열심히 제 할 일을 했다. 향수의 '향'도 모르는 나지만 선배가 움직일 때마다 풍기는 향이 너무 좋아 꽤 비싼 향수일 거라 확신했다. 선배를 닮은 무겁고도 부드러운 향이 났다. 섬유유연제 냄새는 아닌 것 같았다. 아니, 섬유유연제인가? 그렇다면 당장 주문해야지.
"좋은 아침입니다. 음, 주간보고에 앞서서 공지할 게 있는데, 다음 주부터 어린이집으로 실습 가는 조가 어디죠?"
일주일마다 로테이션을 돌았다. 장애인복지관, 노인복지관, 어린이집, 청소년문화의 집. 다음 주엔 나와 현정을 포함한 총 4명이 어린이집으로 배정받았다. 나와 현정은 조심히 손을 들었고, 담당자는 잠시 고민하는듯하더니 말했다.
"어린이집에서 갑작스레 요청이 왔어요. 남자아이들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혹시 괜찮으면 남자분이 있는 조로 바꿨으면 하는데."
나와 현정은 서로를 쳐다봤다. 물놀이 프로그램에 보조교사로 참여해야 한다고 해서 이미 래시가드를 사놓은 상태였다. 어린이들을 케어해야 하긴 하지만 오랜만의 물놀이라 조금은 기대하고 있었다. 고민하다 슬그머니 손을 펴는데 어린이집에 배정받은 다른 실습생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저희가 빠지겠습니다. 사실 오늘부터, 터져서."
그 실습생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뒷목을 긁었다. 아, 그랬구나. 그러면 못 가지. '터졌다.'라는 말로도 남자여자할 것 없이 모두 수긍했다.
"그럼, 어느 조가 갈래요?"
남자가 포함된 조는 무례한 여인이 있는 조와 선배 조였다. 난 당연히 무례한 여인이 있는 조가 갈 줄 알았다. 하지만 무례한 여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 젖는 거 싫어해서요. 지훈 오빠 조한테 양보할게요."
"저, 상의 좀."
"아, 진짜 싫어요! 화장 다시 해야 하는 것도 싫고, 옷 젖는 것도 싫어요."
조원과 상의되지 않은 발언이었나 보다. 그녀와 같은 조인 남자 실습생은 그녀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조랑 4조가 가는 걸로 할게요."
2조는 선배네 조였고, 4조는 우리 조였다. 선배와 물놀이라니. 비록 어린이들을 케어하기 위해 보조교사로 참여하는 거지만 꾸미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잔잔한 설렘이 있었다.
오전엔 실습일지를 확인받고 개인시간을 가졌다. 이 시간에는 공부를 할 수도 있고 마지막 날에 있을 프로그램 발표를 준비할 수도 있다. 개인시간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히는 담당자의 업무가 밀려 업무를 쳐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시간에 나는 주로 어떤 프로그램을 짜야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냥 고민만 했다. 하기 싫은 걸 하고 있으니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왔다. 이번에는 제일 먼저 식당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테이블이 텅텅 비어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반찬들을 식판에 옮겨 담고 출구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쉴 새 없이 밥과 반찬을 입속으로 끌어넣고 있을 때 좁은 시야 안으로 식판이 하나가 들어왔다.
"언니 같이 먹어요. 괜찮죠?"
무례한 여인, 채은이었다. 그녀는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 주위로 그녀의 친구들이 앉았다. 안 괜찮았다. 매우, 매우 불편했다. 왜 갑자기 같이 먹자고 한 건지는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해야 오빠랑 한 테이블에서 같이 먹네요."
어김없이 지훈 선배는 내 옆으로 와 앉았고, 채은은 그런 선배를 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아, 난 또 징검다리구나. 이 상황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맛있게 먹어."
서운함 가득한 채은의 말에 선배는 국물을 떠먹으며 살짝 웃었다. 누가 봐도 가식적인 미소였다. 오늘따라 왼쪽도 오른쪽도 맞은편도 편히 눈을 둘 데 가 없었다. 보이지 않은 레이저들이 서로 얽히고설켰다. 젠장, 타 죽겠네.
오후 일과를 진행했다. 역시나 속이 부대꼈다. 손을 주무르고 명치를 두드리며 실습에 집중해보려고 했지만 손발이 차가워지고 어지럼증도 생겨 어쩔 수 없이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주간의 실습지는 일손이 부족한 장애인복지관이었지라 약을 사러 갈 시간이 없었다. 속이 불편한 채로 실습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작업을 하다 보니 체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드디어 퇴근시간이 왔다. 어서 집으로 가 약을 먹고 쉬고 싶었다. 서둘러 짐을 챙기고 관을 나왔을 때 주차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오빠, 저 좀 데려다주시면 안 돼요?"
"그래요, 오빠. 저희 좀 태워주세요."
"미안. 급하게 가볼 데가 있어서. 다음 주에 보자."
"아, 오빠! 지하철까지만이라도, 네?"
"다음 주에 봐. 잘 가."
아무래도 이채은 무리가 선배에게 데려다 달라고 떼를 쓰는 모양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나는 백팩끈을 야무지게 부여잡고 달릴 준비를 했다. 우리 집은 복지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다. 달리면 3분도 가능했다. 내리막길은 조심조심 내딛고 평지에서 막 뛰려는데 뒤에서 빵빵, 경적이 울렸다. 빨갛고 비싸 보이는 차가 내 옆에서 멈추더니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나는 몸을 가득 웅크리고 경계 가득한 시선으로 창문을 노려봤다.
"혜정아, 타."
조수석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사람은 다름 아닌 선배였다.
"집이 어디야? 데려다줄게."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급하게 가볼 데가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데려다줄게 라니. 앞뒤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말이었다.
"가, 가까워서 괜찮아요."
"어딘데?"
".... 여기요."
난 머리 위에 있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선배는 시선을 위로 올리더니 짧게 탄식을 했다. 그러고는 글로브 박스를 열더니 하얀 약봉투를 꺼내서 내밀었다.
"소화제야. 잘 들어가고, 월요일에 보자."
얼떨결에 약봉투를 받아 들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선배는 웃으며 손을 흔들고는 급히 차를 출발시켰다. 당황스러워 몰랐는데 선배차 뒤로 차가 줄지어 있었다.
"아... 밀려있었구나."
그러다 문득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왔다. 급한 약속 있다던 사람이 날 데려다준다고 하고 약까지 준비하다니. 조금, 설레도 되는 걸까? 그러다 금방 현실로 돌아왔다. 그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후배가 아파 보이니 챙겨준 거겠지. 선배의 전여자친구가 누구였는지 뻔히 아는데, 나 같은 사람을 왜 다른 감정으로 챙겨주겠어. 선배는 내가 감히 꿈꿀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