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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an 25. 2020

며느리 노동절의 일은 왜 다를까

음식은 정성 맛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준비하면서 때로 두근거리는 때도 있는데, 어떤 날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하여간에 소금에 절인 호박의 물기를 닦아내고 밀가루를 묻힌 뒤, 파마늘에 다진고기 속을 도톰하게 붙여서 다시 밀가루를 묻혀서 계란물에 담궜다가 팬 위에 올리면 지글지글. 잘 익도록 고기 쪽부터 먼저 부치고 뒤집어 호박이 노릇노릇해지면 소쿠리에 담습니다. 이게 한두 개가 아니라는게 함정.

표고버섯에 같은 과정으로 고기를 넣어 부치고 나머지는 그냥 동그랑땡. 예년에 했던 깻잎전 고추전은 어인 일로 생략. 새우야채전과 고구마전은 시엄니 평소 안하시던 아이들인데 어인 일로..


갈비 500g 한 팩 얼려놓은게 있다고 하셔서 600g 정도 산적 고기 함께 해동해 일일이 십자 칼집을 내어 함께 재워두었다가 아침에 갈비구이.
보리굴비는 통계피와 양파 함께 찌면 냄새가 하나도 안난다는 시이모님 조언에 따라 해봤는데 냄새가 안 나지는 않겠죠. 전날 세 마리 곱게 쪄서 아침에 다시 구워냈고, 별로 젓가락이 향하지 않자 "발라 놓아야겠다" 시엄니 한 마디에 재빨리 장갑 끼고 세 마리 쫙쫙 찢었는데 보리굴비 좋아하는 제 입으로는 한 점도 못 들어간건 그렇다치고.

황태구이는 시엄니가 미리 양념해놓은거 아침에 기름 넉넉히 두르고 구웠습니다. 고소하고 짭조름하고 적당히 매콤한 맛. 말린호박은 다시 불려서 볶고. 삶은 고사리는 다진 쇠고기와 함께 액젓에 조려내고, 시금치는 걍 기본으로.. 나물 종류는 모두 전날 해놓았고. 미리 내놓은 육수에 쇠고기 넉넉히 넣어 떡국... 혹시 몰라 조금씩 떴더니 왜 이렇게 조금 떴냐고 한 소리 들었지만.. 당초 13명이 아침 함께 한다고 했는데, 손님들 오시기 10분 전에 16명이란 걸 알았고요. 첫 숟가락 뜨자마자 4명이 더 오시는 바람에 번개처럼 일어나 제 자리 내드리고 다행히 남겨놓은 떡국 차려드렸죠. 작은댁 동서가 잡채를 해온것 외에는 온전히 시엄니와 제 노동력이 투입됐는데, 결국 시엄니와 저만 아침을 제대로 못 먹었다는 것도 기록. 다른 며느리들이 자리 비었으니 형님 가서 드시라고 하는데, 시엄니가 안 드시고 분주한데 제가 어찌. 정리부터 이후 과일과 다과까지 일은 끝도 없잖아요.

집안 남자들은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는데 집안 며느리들은 이래저래 종종거리거나, 눈치보는게 빤해서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고요. 집안 남자 누군가는 일하는게 온당하다고 생각해 만만한 아들을 설거지 조수로 쓰는데 시엄니가 "고모 시킬테니 저리 가라"고 자꾸 부엌에서 몰아내는 바람에 "어머님. 박씨 남자 누군가는 일해야죠"라고 기어이 한마디 하고 말았죠. 2020년 설날 아침 이야기입니다. 집안 남자 중심의 모임인데 노동은 며느리 몫인 걸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며느리 노동절.


오후에 집에 돌아와 누가 피곤한건지 온 가족 낮잠에 빠졌는데.. 그때부터 친정식구들 저녁 음식 준비. 그래도 저녁은 포트럭 파티. 엄마는 갈비찜, 동생은 훈제오리와 연어회를 해온다고 했고.. 제게 제발 음식 좀 하지 말라고 해서 일찌감치 조촐한 메뉴도 공유했어요. 갈비찜에 오리까지 메인 메뉴가 충분하니 곁들이는 야채 위주로 준비한다고 했죠.. 미나리와 오이를 듬뿍 넣은 오징어초회, 전복마늘구이, 며칠전 레서피 솔깃한 연근무침 두 가지, 얼마전 톡딜로 저렴하게 구입한 명란젓은 아침 시댁 상에도 냈는데 괜찮길래 다시 시도. 명란을 약불에 노릇하게 구워서 총총 썬뒤 채썬 자색양파 위에 단정하게 담아 다진파 올려서 마무리. 그리고 전날 미리 해둔 방울토마토 마리네이드. 이건 방울토마토 일일이 십자 칼집 내어 데쳐서 껍질 벗기는데 까지가 일. 나머지야 양파 다지고 올리브유 식초 소금후추설탕 바질로즈마리 휘리릭.


정말 별 것 아닌 반찬 정도라 생각했는데.. 통연근 껍질 벗겨 얇게 썰어 데치고, 브로콜리 썰어 데치고, 오징어 칼집 내어 데치고, 전복은 칫솔로 싹싹 문질러 씻고, 미나리를 다듬고... 이게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더군요. 그리고 떡국 할까 하다가 냉동해둔 복어지리 밀키트 절반을 끓이기로 했는데.. 무 먼저 익히고, 콩나물 미나리 준비하고.. 음.... 2020년 설날 저녁을 위해 일 좀 했습니다...  남편은 낮잠에서 깬 뒤 눈치 빠르게 집안 청소를 평소보다 쎄게 하고.. 온갖 뒷정리를 신속하게... 뭐. 그래봐야..
저녁도 설거지는 아들 몫. 엄마 눈치 보느라, 지도 애썼겠죠.

저는 음식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친정 식구들 모인 저녁 음식 정도는 맘 고생 없어요. 더구나 포트럭으로 각자 조금씩 일손을 나눴잖아요... 아무리 요리를 좋아해도 며느리 노동절 불평은 계속됩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는데 집안 분위기는 바뀌지 않는다는게, 아니 집안 어르신들은 바뀌지 않는 것이 문제. 계속 참고 견디기에는 인내심이 점점 줄어드는게 나이 탓 아닐까요. 묵묵히 도리에 순종하고 싹싹하게 감정노동까지 하는 그런 며느리로 남기에는 머리가 굵은 탓일까요.


2020년 설날의 기록은.. 지난 20여년 어느 며느리 노동절에 붙여놓아도 비슷한 얘기입니다. 아빠가 쇠약해지면서 엄마 일이 늘어난지라, 명절 저녁을 제가 호스트하는 것 외에는 바뀐게 없군요.. 시엄니에 대한 연대의 마음으로 일한다지만, 여자들은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있고 너른 거실은 남자들의 몫이라든지.. 테이블의 서열도 시엄니보다도 손자라든지, 공간부터 시작해 집안 남성 어르신 중심으로 한 질서가 차별적이어요. 저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차리고 치우는 과정에서 거의 일하지 않는 남자들의 명절이 불편한건 당연한거 아닌가요? 


슬픈건.. 새해를 시작하는 설날이든.. 추석이든.  날의 의미를 생각하며 인사나누는 것도 사치란거죠.. 전날부터 아무 생각 없고 당일엔 정말 정신 없어서 그냥 평소보다 고되고 우울하거나 멜랑꼴리한 날로 마감하다니..


설날 전날 귀가길의 대화를 박제했는데... 이또한 계속 반복된다는게 답답하네요.


나 : 누구누구네는 여행 갔다네.
그 : 우리도 뭐 하지 말자. 명절 전날 앞으로 가지 마.
나 : 어떻게 안 가. 어머님 혼자 다 하시라고?
그 : 전 안 부치면 되잖아.
나 : 안 부치시겠어?
그 : 암튼 가지 마. 엄마에게 하지 말라고 할게.
나 : 어머님이 상 안 차리시겠어? 지난번에도 어머님에게 말한다며?
그 : 아, 엄마는 왜 자꾸 하는지 몰라. 암튼 하지 말자고 해야지.
나 : 대안은 뭔데? 안 모일거야?

명절 전날 귀가길 부부 대화가 몇 년 째 되돌이표.
일의 양은 많이 줄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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