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엄니, 엄마 모두 고생 많으셨어요.
"이번에는 고추전 깻잎전은 안 할란다."
나는 노예처럼 길들여진 며느리였을까. 올해는 일을 줄이겠다는 시엄니의 이 말씀에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소쿠리 가득 부치던 전이 한 소쿠리로 줄어들더니, 아이템도 축소된다. 명절 일주일 전부터 장을 보시면서 고추도 반듯한 것으로만 골라서 전 재료를 준비하던 분이었다. 십수년 전 며느리를 맞으셨을 때는 전도 엄청나게 부치시고, 송편도 빚고, 식혜도 만드셨던 분이었다. 차례상 대신 '상다리 휘는 밥상' 컨셉으로 바뀌면서 전의 인기가 줄기도 했지만, 이제는 어머님 기력도 예전보다 떨어지신게 분명하다. 호박에도 꼭 다진 고기를 올려 부치셨는데 올해는 그것도 생략했다. 호박과 동태전, 버섯전 정도야 일도 아니다.
그래도 새로 추가된 전도 있다. 장떡. 시아버지께서 어릴적 드시던 음식이라고, 시엄니께서 신이 나서 설명해주신다. 명절, 절대 손도 까딱 않으시는 시아버지가 얄밉지 않으신 모양이다. 평소 박씨 집안 제사니 차례니 신경 끄고 실상 시엄니에 대한, 여성 연대의 마음으로 일을 거든다는 것을 시엄니는 아실리 없겠지. 부침가루로 반죽을 만든 뒤, 고추만 한 가득 썰어넣고 된장 한 숟가락 푹 넣는다. 버섯도 조금 넣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고추면 충분하다고. 기름 넉넉히 두르고 납작하게 눌러가며 부쳤다. 딸이 이 맛에 반해버려서, 나중에 해줄 요량으로 열심히 배웠다.
닭냉채와 탕평채. 칼질만 열심히 하면 쉬운 메뉴다. 시엄니가 보기엔 어림 없지만, 나도 이제 채 좀 썬다. 아래 사진에서 내 칼질이 최소 80%. 닭냉채는 겨자 소스로, 탕평채에는 양념간장을 부었다. 점심에 더 해먹었듯, 탕평채에 오이까지 썰어올린 버전이 낫다. 어쩐지 명절 다른 메뉴보다는 살이 덜 찌지 않을까 위안을 받으면서, 너무 먹었다..
시엄니의 대표 메뉴 중 하나인 조기찜. 생조기를 사다가 이틀 정도 냉장고에 넣고 살짝 말려서 살을 단단하게 만드신다. 전날 한 번 익히고, 당일 아침에 익힐 때는 지단을 올리고 양념장도 끼얹어 가면서 익힌다. 결혼 초에는 큼지막한 녀석으로 두 마리만 해서, 주로 남자들 상에만 올리셨다. 며느리 구력도 쌓이다보니, 두 접시 대신 세 접시, 네 접시 준비하는 것으로 어머님을 설득했다. 며느리에게는 그렇게까지 신경쓰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손녀에게 차별을 배우도록 하면 안된다는 며느리의 고집에 넘어가셨다. 오늘 나는 한 마리를 딸 앞에 놓아주고, 많이 권했다. 시아버님과 남편 바로 옆자리, 말하자면 윗상의 아들은 알아서 잘 먹었겠지.
불고기야 흔한 음식이지만, 양념 잘 해서 꼬치에 끼워 구우면, 이게 또 달라진다. 인기 많았다. 시엄니에게 또 한 수 배우고. 그냥 밑반찬 한 가지일 뿐이지만, 오이도라지무침이 그냥 반찬은 아니지. 흙이 잔뜩 뭍어 있는, 인삼 비슷하게 생긴 통도라지를 결혼하고 처음 구경했다. 엄마는 그냥 마트의 도라지를 샀지만, 시엄니는 꼭 통도라지를 사셨다. 한 때는 경동시장 가서 장을 따로 보셨다. 하나하나 껍질을 살살 긁어내듯 벗기고 얇게 가르면 마트 도라지처럼 바뀐다. 그걸 또 한나절 물에 담궈 쓴 맛을 뺀다. 정성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저 도라지 무침이나 나물, 밑반찬 하나일 뿐인데 저기 들어가는 정성을 보고 있으면 뭐라 말을 못하겠다.
신혼 때는 멋 모르고 그냥 먹기도 했지만, 이제는 입에도 손에도 안대는 토란. 어제 토란 껍질 까는 것은 못 돕겠다고 말씀드렸다. 알러지 있는 사람에게는 멀리하고 싶은게 토란이다. 차라리 도라지 껍질 까는 건 도울 수 있었을텐데, 시엄니는 이미 도라지는 모두 다듬어 놓으셨고, 토란이 남아 있었는데.. 돕지 못했다. 차라리 저건 안 하시면 안될까 싶은 메뉴. 그런데 식구들은 왜 이렇게 잘 먹는건가.
그렇게 한 상을 차렸다. 어제 마침 작은 아버님께서 자전거 타다가 다치셔서 오늘 못 오셨다. 작은 어머님만 사촌 작은 도련님과 오셨다. 시엄니는 작은 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바리바리 싸주셨다. 그러는 동안, 저 많은 설거지는 온전히 내 차지. 일이 생겨 사촌 동서네도 오지 못해서 간만 혼자 분주했다. 그래서 불렀다. "아들. 좀 도와라." 내가 세제로 빡빡 접시를 닦아내면 흐르는 물에 뽀득뽀득 씻어내는 건 아들이 했다. 당신의 아들이 부엌 드나드는 것에, 이제는 말씀은 안하시지만 은근 불편해 하시는 시아버지를 생각해서, 내 아들을 부려먹었다. 딸이 도와줄까 묻길래, "이 집안의 여성 노동력은 엄마가 충분히 담당하고 있으니, 균형을 위해 아들에게 시키겠다"고 했다. 아들은 군말 않고 씩씩하게 설거지를 잘 도왔다.
들어가지도 않는 점심을 먹는둥 마는 둥 하고.. 눈치를 슬슬 보다가 오후에 시댁을 나선다. 저녁은 친정에서 먹는다. 두 딸네 가족을 기다리며, 엄마 아빠는 둘이서 음식을 준비하신다. 대체 왜 전을 부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친정의 명절 음식은 튀김이다. 역시 아빠 입맛을 위한 엄마의 선택이다. 지아비의 입맛이 가족의 밥상을 좌우한다. 뭐, 나 역시 남편이 즐기지 않는 것을 굳이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엄니, 엄마와는 태도에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정말 넉넉히 준비하셨고, 두 딸에게 다 싸주셨다.
울 엄마의 진정한 명절 백미는 갈비찜. 저건 냄비가 아니라 들통이라고 부르는 어마무시한 크기의 아이다. 저기에 엄청난 양의 갈비를 하신다. 당근이 작아 보이지 않는가? 정말 양으로 압도한다. 이게 다 외할머니 갈비찜에 환장하는 울 애들의 입맛 탓이다. 그러고보니, 울 엄마는 아빠 입맛보다 요즘은 손주들 입맛에 더 신경쓰시는 건가. 뼈가 다 저절로 빠질 정도로 푹 익혀서 부드럽다. 주로 배와 양파를 갈아 넣는데, 이번에는 사과도 넣으셨단다. 특히 아들이 저 갈비찜 킬러다. 물론 한가득 싸가지고 왔다.
갈비만 해도, 고기가 넘쳐나는데.. 메인 요리 중 하나가 사골국이다. 그것도 고기 건더기가 제대로 실하게 들었다. 그러고보니, 울 엄마는 손주 입맛 뿐 아니라 사위들도 엄청 신경 쓰시지. 두 사위를 위해서는 국의 양이 달랐다. 백년손님 사위들이야 잘 먹어주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오늘은 아침 저녁으로 도라지가 풍년. 아침에는 오이도라지무침, 고춧가루 약간에 설탕 소금 식초로 무쳐냈다면, 저녁은 정통 도라지 나물이다. 쓴맛은 적당하고, 부드럽게 익혔다. 어릴 적에는 참 먹기 싫어하는 반찬이었는데, 어느 순간 도라지 맛을 즐기게 됐더랬지. 그러나 내 아이들에게는 절대 해주지 않는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 그렇다. 주로 일품 요리, 휘리릭 20분 내에 썰고 볶는걸 끝내는 스타일로서 나는 나물을 하지 않는다. 애들이 즐겨 먹는 것도 아니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렇다. 시엄니에게 배워서 나물 좀 잘 무친다는 자부심은 가득하지만, 저게 보통 일이 아니지. 오늘 엄마표 고사리 나물도 정말 좋았는데. 집안일을 좀 더 진득하게 할 때가 오면 저런걸 하게 될까. 가끔 내 세대에서 맥이 끊기는 음식들 생각을 하는데, 나물도 하기 쉬운 샐러드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을까 아주 조금 걱정해본다.
엄마표 약식. 사실 전주 출신으로서 거의 한정식집 안주인 수준의 손맛을 지닌 시엄니와 달리, 엄마 손맛은 그냥 평범한 편이었는데, 요즘은 별걸 다 하신다. 약식도, 떡도 직접 만들고.. 손주들 수제 요거트도 매주 가져다주시고...
오늘 엄마가 다 해놓은 밥상을 기다리면서, 소파에 널부러져 '복면가왕'을 보다가 울었다. 소녀감성 코스모스가 부른 '양화대교'. 그녀는 끝내주게 노래를 잘 불렀고, 노랫말은 강하고 진했다. 행복하자, 우리.. 아프지 말자.
명절을 '며느리 노동절'이라 부른지 오래. 하루 전날 시댁에서 일하고, 당일 아침부터 반나절 일하는게 전부라면 전부이지만.. 모티베이션, 동기 부여의 문제다. 여성들을 부려먹기만 하는 구조에서는 일 할 맛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남자들의 밥상만 우대하는 구조라면 더 그렇다. 그런걸, 무슨 남편을 사랑하니까 참고 한다는 식으로 설득하는 건, 정말 설득력 떨어지지 않나. 남편이 일을 돕는게 왜 슬금슬금 눈치보면서 해야할 일이 되는걸까. 시엄니 도우면서, 일을 배웠고..음식하는 재미를 알게 됐지만, 그건 그거고.. 명절이 다시 재미있을 날이 올까. 마음과 몸이 좀 편하면 안되는걸까.
TV에서는 자식들은 다 도둑년놈들이라고 외치는 막장오브막장 드라마가 나오는 추석이었다. 뭐,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시엄니와 엄마가 싸주신 음식으로 며칠은 살겠다. 엄마들은 너무 오래 수고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셨다. 그렇게 또 명절이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