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비디오게임 개발 과정의 공통점은, 모든 일이 막판에 한꺼번에 터진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게임 개발 마지막 몇 달에서 몇 주 동안 게임을 다듬고, 시험하고, 막판에 생각나는 모든 기능을 추가하느라 스튜디오는 아수라장이 된다. 그러다 불현듯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시각 효과든, 음향이든, 게임 프레임 레이트를 안정시키는 최적화 설정이든. 보통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한 신성한 순간이 찾아온다. 서로 겉도는 것 같던 부분들이 한데 뭉치면서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62~63쪽)
책은 제목이 다 했어요. Blood, Sweat, and Pixels. 그 마지막 순간을 위해 피와 땀, 사람을 갈아넣는 얘기입니다. 그 승리와 격동의 이야기. 게임 만드는 일이 '영웅의 여정' 같기도 하고, '삽질의 연속'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매우 특이한 종합예술이긴 합니다. ㅅㅎ님 제안으로 결정한 트레바리 #디지털시대읽기 6월 책. 기자가 현장 얘기, 경험 등을 녹여낸 논픽션을 매우 좋아했고, 게임도 낯선 분야라 골랐는데 결과적으로 어마어마한 전화위복(?)의 시간을 경험했습니다.
책은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언차티드4', '스타듀 밸리', '디아블로3', '헤일로 워즈', '드래곤 에이지:인퀴지션', '셔블 나이트', '데스티니', '더 위처3', '스타워즈 1313' 등의 개발 뒷 얘기입니다. 게임 개발자에게는 보석 같은 이야기일테고, 저처럼 게임문외한에게는 다른 포인트게 있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제 발제문은 이랬어요.
게임 산업>
- 크런치 모드, 영화나 방송, 혹은 다른 업계 야근과 다를까요?
- 게임 산업, 이 정도란거 실감한 적 있어요? 게임은 ‘그들만의 우주’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 게임 서사, 영화와 다른 콘텐츠와 비교해 어떻게 다를까요? 어느 쪽이 더 맘에 들어요?
- 주주자본주의, 투자자를 위한 산업 구조에 문제가 있다면 어떤 해법이 가능할까요?
게임 노동자>
- 가족 같은 분위기, 동아리 같은 분위기의 기업, 괜찮을 것 같아요?
- 젊은 미혼 남성 중심 문화. 마치 군대처럼 합숙하는 분위기. 바뀔까요?
- 갓겜, 망겜. 리스크와 보상은 어떻게 구성되는게 괜찮을까요?
- 게임 노조의 움직임을 지지하거나 우려한다면 어떤 이유죠?
우리 클럽이 디지털'시대'읽기 잖아요. 게임 잘 모르면 저런 쪽에 관심 갖게 되고, 실제로는 멤버들 토론을 들어봐도, 조직 운영, 리더십 등의 주제가 꽤 등장했어요. 동생이 게임 개발자라는 ㄱㅇ님의 생생 이야기, 게임 즐기는 엔지니어 ㅎㄱ님 뿐만 아니라 각자 다른 관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더라고요.
진짜 돈줄이 끊겨서 고심 끝에 킥스타터 크라우드 펀딩을 시도한 게임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 사례는 '유저와의 소통'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처음 목표액의 네 배, 398만 달러가 모였다고요. 7.4만 명의 유저들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팬들에게 1~2주에 한번씩 작업 현황을 공개하고, 화려한 콘셉 아트와 대화 견본, 전투 및 캐릭터를 상세하게 설명하면 지체 없이 피드백이 쏟아졌다고요.
“게임 제작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지 않은 삼사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게임을 만들고 있는 기분"(55쪽)이었다고요.
게임 개발은 정말 다양한게, 회사도 팀도, 유저 피드백도 아니라 홀로 만든 경우도 있습니다. 여자친구가 생계를 책임지는 동안 혼자 집에서 몇 년 게임만 만든 20대 청년 에릭 바론. '창작에 대한 전권을 손에 쥐는 대신 고독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는 '스타듀 밸리'를 만들었고 6개월 만에 150만장 판매, 2100만 달러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게임 개발의 크런치 모드, 피할 수 없을까
“크런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은 아마도, 최고의 게임을 만들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일 겁니다.” '언차티드4' 공동 디렉터 닐 드러크먼의 말입니다.(101쪽)
게임 업계의 크런치 모드는 말그대로 사람을 쥐어짜는 업무 패턴입니다. 1997년 출시되자마자 수백 만 장이 팔렸다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를 위해 앙상블이라는 회사의 직원들은 1년 가까이 매주 100시간씩 일하는 강행군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180쪽)
매주 100시간을 1년? 이건 많이 심한거라 생각하지만 몇 주 강행군은 가끔 듣는 얘기입니다. 책에도 나온 앙상블은 직원들의 장기근속으로도 유명했는데 그야말로 가족 같은 분위기가 비결이었다고 나옵니다. 젊은 미혼 남성들이 모여 함게 밤을 지새우고 주말을 보내며 회사를 키웠다고요. 당시 모든 지원자는 20대 직원 전원을 만나는 혹독한 면접을 통해 만장일치해야 뽑았다네요.
국내에서도 넷마블은 '구로의 꺼지지 않는 등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야근이 많은 회사로 유명합니다. 게임 뿐 아니라 인터넷 서비스도 출시 직전엔 맨날 야근 모드, 흔합니다. 그런데 진짜 이게 최선일까요?
영화 쪽도 밤샘 철야 일상적이었죠.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을 만들면서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고 주52시간을 지키려 노력했다는 것이 오히려 화제가 됐습니다.
드라마 제작현장에도 '봉준호' 나타날 수 있을까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도 그 업계에서 이례적인 52시간 근무로 '슬기로운 촬영생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했어요. 게임은 정말 안될까?
트레바리 모임 전날 디스이즈게임(https://www.thisisgame.com/) 대표 시몬님에게 톡을 드렸어요. 피땀픽셀 관련 주52시간 이슈에 대해 짧게 페북 댓글 남기신걸 본 적 있거든요. 게임 산업은 정녕 크런치 없이 불가능한건지, 최근 게임 트렌드도 궁금했고 겸사겸사 여쭤보려고 통화를 청했습니다. 이 책을 정말 남다른 경험으로 남기게 된 건, 시몬님이 트레바리 모임 날 직접 와주신 덕분입니다!!! 감히 청하지 않았는데 구경가도 되냐고 하셔서 제가 로또 맞았어요. 저런 분도 몇 년 뵙고 있다니, 제가 '인맥부자'구나, 스스로 실감하며 시몬님께 물어보려고 생각한 저를 칭찬했습니다. 엉엉. 한 가지 실수는 이날 시몬님 말씀을 녹음하지 않은 것ㅠㅠ 주옥 같은 말씀인데 부실한 제 기억력으로 살려내야 하다니.
시몬님 말씀을 들어보면, 게임은 다른 쪽과 다른게 분명 있습니다. 게임은 그 어떤 콘텐츠보다 작업이 훨씬 복잡하고 엮여 있습니다. 10분 분량만 재촬영한다는 컨셉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서사 게임의 경우, 한 대목만 바꾸려 해도 전체를 흔들게 되고, 디자이너(기획자), 아티스트, 프로그래머 등이 커뮤니케이션하며 일하는 과정 자체가 물리적 시간이 필요합니다. 10명, 20명 팀은 크런치 안해도 해볼 수 있겠지만, 200명 500명 팀은 얘기가 다르다는걸 인정합니다.
그래도, 시나리오를 좀 더 완벽하게 쓰고 로드맵을 잘 짜면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지 않겠냐 물었습니다. 그런데 멤버 ㅎㄱ님이 앞서 말했듯, 영화나 드라마, 소설 그 어떤 콘텐츠와 다르게 게임은 '유저가 창조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유저의 판단과 결정, 피드백에 따라 모든게 달라져서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그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해서 창조하는 개발 과정이 무진장 복잡합니다.
시몬님은 쿨하게 인정합니다. '클래시로얄', '브롤스타즈' 같은걸 만든 핀란드 슈퍼셀 같은 회사는 크런치 없다고요. 워라벨 좋다고요. 그럼 우리도 그렇게? 그건 게임이 다르답니다. 메카닉 게임. 복잡한 서사, 완벽한 그래픽 같은게 없는 게임입니다. 근데 돈도 엄청 잘 벌어요. 그럼 그런거 만들면 되잖냐고 물었더니, 왜 슈퍼셀이냐고. 왜 슈퍼셀을 꺽는 기업이 없냐고 반문하셨어요. 단순해보이지만 엄청 잘 만든 게임이라고요.
엄청 잘 만든 게임은 오래 갑니다. '던전앤파이터'가 그렇고, 아직도 '롤' 얘기하는 것 보면 그래요. 잘 만든 게임 '리니지'는 '리니지M'으로 모바일 시대를 맞고, 중국에서 대박을 낸 '미르의 전설' 역시 모바일로 재승부.
이쯤에서 제 옛날 리뷰도 끼워팔아봅니다. 한때 인생 10권 책 넣냐 마냐 고심했을 정도로 좋았던 얘기입니다. '피땀픽셀'에도 언급된 '헤일로'를 비롯해 어떤 종류의 게임은 개발 과정도, 결과물도 상상 초월...
게임 그 자체의 스케일도 폄하해서는 곤란하다. 이미 종합예술이다. ‘헤일로3’란 게임을 만드는 작업은 중세 성당 축조에 비견되기도 했다. 3년 동안 250명이 넘는 미술가, 디자이너, 작가, 프로그래머, 엔지니어가 힘을 합쳤다. 오디오가 54000개, 대사가 40000줄, 발소리도 무엇을 밟느냐에 따라 2700개로 세분화된다.
시몬님 말로는 엔씨소프트, 넥슨, 넷마블(3N) 등 최고의 기업들은 그래도 사정이 낫다고 합니다. 저는 악명 높다고 알고 있던 넷마블도 (여러분의 희생 이후..) 몇 년 새 달라졌다고요. 이쯤에서 또 키워팔아봅니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게임 업체의 경우, 크런치 모드도 심각하고, 더 심각한 건 게임의 성공문이 매우 좁아졌다는 겁니다. 이게 사실 많은 문제의 근원이기는 합니다.. 요즘 코로나19 이후 게임 업계는 수혜자 아니냐고 여쭸는데, 잘 나가던 게임들만 잘됐다고 합니다. 생태계 문제로 근본적으로 봐야할 이유입니다. 무엇보다 인디게임이 잘 되도록 해주고 성장할 수 발판을 마련해주는게 큰 게임 업체에게도 당연히 필수적이죠..
예컨대 핀란드 슈퍼셀은 매우 훌륭한 기업, 세금 내는게 자부심인 정서까지 완벽한데요. 그 슈퍼셀은 진짜 고수 경력자만 채용한다고 합니다. 그럼 적은 숫자에서도 쉽게 나오죠. 그런 슈퍼셀이 있으려면, 그런 경력자를 키워낼 인디게임 생태계가 정말 절실합니다.
게임을 빠르게 진행해서 아바타 내공을 키우는 '오토' 프로그램이 중국에서는 아예 옵션으로 제공되면서 게임 유저의 경험을 바꿨다거나,(마치 국내 야구의 빠던 처럼요) 해킹을 통해 능력을 갖게 되는 '게임 핵(hack)'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다거나(핵이 뭐냐는 제게, 총쏘는 게임- FPS, First-person shooter, 1인용 슈팅게임- 하는데 바위 뒤의 적도 볼 수 있는 투시력을 해킹 통해 갖게 되는 사례를 말씀해주심!) 전체 판도를 바꾸는 중국 얘기도 재미있었고요.
집집마다 콘솔(닌텐도, 쏘니 플레이스테이션, MS 엑스박스)을 두던 미국의 관행과 달리 그런 부잣집이 적어서 콘솔 시장 건너뛰고 PC, 모바일로 넘어간 한국 중국의 차이점도 흥미롭습니다. 왜 미국은 여전히 콘솔 시장이 큰가 했어요.
게임 퍼블리셔와 유통망에게 70% 내주고 제작사가 30% 가져가는 관행에 울컥해서 클라우드 기반으로 게임 유통을 다 잡아먹기 시작했다는 밸브의 스팀. 3G에서 멜론 같은 음원 스트리밍이, 4G에서 영상 스트리밍 시대가 가능했다면 5G에서는 게임 스트리밍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말씀도 메모해둡니다. (그러나 VR이 왜 게임에서 안되는지도 시몬님 말씀 찬찬히 들어보면 엄청 설득력 있습니다)
따끈한 디스이즈게임 전문기자의 글. 스팀이 홀로 국내 룰을 지키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도 참고
무튼 밸브라는 회사는 그야말로 수평적 조직. 위계가 1도 없어서 조직운영 연구 사례라고요. 게임 업계에서는 창의적 20대와 경험 많은 40대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협업 시너지 낼 것인지 그 자체가 큰 화두이기도 해서, 캐나다 컨퍼런스 가면 그런 주제 강연가 엄청 많다고요. 캐나다 얘기 나온김에! 캐나다가 게임 강국으로 뜬 이유도 흥미롭습니다.
간단요약하면, 미래 콘텐츠산업 정책지원 약속한 퀘벡에서 기업 유치해야 하는데 어렵다보니.. 프랑스어 쓰는 프랑스기업 유비소프트 찾아가서, 지사를 내라고 설득하다가 실패. 거기 왜 가냐고 하니까, 인건비 50% 보조해주겠다고 제안. 왜 유비만 해주냐고 하는 다른 게임 기업들에게도 인건비 50% 지원. 그쪽으로 쏠리니까, 토론토, 밴쿠버 이런 영어권 지역에서도 유사한 지원제도 도입. 좋은 게임 기업들이 몰리니까 인근 대학에 게임 프로그래밍 특화된 산학 강의가 늘어나고, 인재가 쏟아지고.. 세금 내고, 고용 하고, 선순환.. 1년씩 예산 찔끔 나눠주는 방식의 정부 지원을 다시 생각해야 할듯요.
폴란드가 게임강국이 된건.. 순전히 우리나라 80~90년대 방식의 크런치 덕분이란 얘기도 생각할 꺼리를 남기는데, 우리는 그럼 그 다음 단계 갈 때가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이날 함께 한 모두가 시몬님 말씀에 눈 반짝 귀 쫑긋, 진짜 너무너무 재미있었어요. 알고보니 레딧의 게임 커뮤니티 운영진이라는 ㅅㅎ님의 풍부한 배경 설명까지 곁들여서, 불과 몇 시간 만에 게임 책 한 권에 더해 게임에 대한 이해를 엄청 넓힌 시간이었습니다. 언택트 산업 육성하고 싶다거나, 좋은 게임 생태계를 만드는데 관심있다면 시몬님 모셔서 꼭 얘기 청해보기를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