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Aug 03. 2020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77은 죄가 아니거늘


어쩌다가 이렇게 비루한 몸을 갖게 됐는지... (아니, 어쩌다가 라고 하면 안되죠. 이십 몇 년 사회 생활을 술과 고기로 버텼는데 인과응보랄까...)
어쩌다가 몸이 이렇게 부끄러운 세상이 됐는지, 이게 더 정확합니다.. 물론 한때는 저도 55 였으나, 66도 안맞아 77을 입은지 오래. 77인게 죄인가요. 미국 갔더니 한국 66, 77이 고작 스몰 혹은 미디엄 이던데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전 새로 뉴스를 진행하게 된 사람입니다. 고민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제가 옷 사이즈가 77이라...... 작고 뚱뚱하면 괜찮을 텐데 제가 좀 크고 뚱뚱합니다. 그리고 출산 이후에 뱃살이 특히 심각해서...... 중앙 집중성 비만 아시죠? 뭐랄까요. 거미형 몸매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이아몬드?" (16쪽)

어느날 갑자기 앵커로 내정된 저자의 고민은 이렇게 출발합니다. 초리얼 고백이죠? 앵커 의상을 챙겨주는 코디님과 저런 통화를 해야했던 겁니다. 출입처인 국회 복도 구석에서 조용조용. 그리고 미리 얘기 했음에도 불구, 코디님은 대부분의 앵커 사이즈에 맞춰서 준비했다고요...

왜 코디님은 내 말을 믿지 않았을까?!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한 건가? 방송국에는 77사이즈라고는 없는 것인가?
"저 코르셋을 한번 구입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아니 지금 여성들이 '탈코르셋 운동'을 하는 마당에 저한테 코르셋을 사라는 겁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물론 이 말은 속으로만 외치고 꾹 삼켰다..  (17~18쪽)

여성의 몸에 대한 억압을 멈추라는 저자의 절규에 깊이 공감하면서, 사실 이 글은 그가 브런치에 연재할 때 푹 빠져서 봤습니다. 글을 너무 재미나게 쓰는 덕분에 혼자 큭큭 대면서 보곤 했죠. 반드시 책으로 묶여서 나오겠구나 했는데 역시나.
출판 이후 글들은 숨김처리 하신 모양이지만, 후기도 재미있습니다.


그는 77 때문에 상처받고 분노합니다. 그의 모든 에피소드에 완벽하게 공감했어요. 우리는 왜 사이즈 때문에 상처 씩이나 받아야 하나요. 일하는 엄마로서 공감 포인트도 이어집니다.

30~40대 워킹맘이 쓰러졌다는 얘기가 들릴 떄마다 가슴이 덜컥한다...
처음 정치팀에 왔을 때 한 후배가 "방광염을 조심하라"고 말했다. 소변을 참으며 일하다 보면, 방광염에 걸린다는 거였다. 처음엔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소변을 참으며 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78쪽)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때는 특히 야근한 다음 날이다. 밤을 새우고 아침 9시 넘어 집에 들어와 오후 1~2시쯤 일어나서는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간다.. (80쪽)


중장비에 가까운 노트북을 짊어매고,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2002년 쯤을 기억합니다. 난생 처음 스포츠마사지라는 걸 받으러 갔습니다. 2007년 법조기자 하다가 또 겁이 덜컥 나던 무렵, 당시 유행하던 발리 피트니스에 등록했습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미스터코리아 출신 착한 쌤에게 피티를 받았죠. 거기 망해서 회비 날리기 까지 한 1년 다녔던거 같아요. 워킹맘에겐 쉴 틈도 없었고, 집은 휴식처가 아니었어요. 알아서 각자도생, 살 길을 꼭 찾아야만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시댁 더부살이 시절 몸이 진짜 아팠던 2010년인가, 휴가를 내고도 출근한다고 집을 나선 뒤 찜질방에서 시체처럼 쓰러졌던 날도 있네요. 화장실도 못 간 하루였다고 탄식하던 날은 또 얼마나 많던지...  우리는 다들 그렇게 버텨왔는데, 한참 후배인 저자도 그랬다니...

대한민국에서 워킹맘으로서 나의 육아 여건은 상위 1퍼센트 안에 든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나도 하루하루를 버틴다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걸 보면 우리 사회가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137쪽)


ㅠㅠㅠㅠ 보탤 말이 없군요.

책은 77 앵커로서, 워킹맘으로서 고민 뿐 아니라 현장에서 치열하게 취재하는 직업인으로서 성실한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워낙 글솜씨가 좋아서 너무 빨리 읽어버린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내 자리는 내가 정한다, 제목 에피소드도 의미심장한데요. 여성에게는 사소한 하나하나가 날마다 전략을 세우고 쟁취해야 하는 일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자들은 주어진 거라 전혀 의식조차 하지 않을 일들에 소모되기는 싫은데, 현실은 아직 그렇습니다. 그래서 서로 지치지 말자고 어깨를 두드리는 마음으로 이런 기록을 남겨준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때로는 흔들리는 것조차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방송인 김소영 책발전소 대표가 남겨준 추천사에 흔들렸어요. 자유를 갈망하지만, 때로 다이어트도 하는 거고, 77에 괴로워하다가도 77이면 어때, 그렇게도 생각을 바꿔보면서 온갖 고민이 끝도 없습니다. 우리 잘못 아닌거죠. 그렇다고 77 인정 투쟁을 할 일도 아니고. 몸에 대한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지 못하는 저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내봅니다. 우리는 그래도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헤헷. 저자 사인본! .. 이 중요한게 아니라 저자 소개글! 이분 글 스타일 느낌 오죠? 진짜 매력 철철

매거진의 이전글 <임계장 이야기> 사람 대접은 꿈꾸지마, 공정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