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냐 정혜승 May 29. 2021

<자본주의의 미래> 윤리적 자본주의, 짜릿한 이유

자본주의 사회는 병들었습니다. 자본주의 4.0도 나오고, 별별 얘기가 다 튀어나오는게 다 아파서 그래요. 
대표적 징후가 사회적 신뢰의 추락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경제학자가 자본주의의 미래를 논하는데, 계속 윤리 얘기가 나오고, 공동체의 방향을 말합니다.
'디지털 국부론'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꺼내들 때의 심정은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이후의 금과옥조가 좀 바뀌어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디지털 시대의 특성은 국경을 무시한 빅테크 기업의 네트워크 효과와 승자독식으로 나타납니다. 과거의 독과점 규제도 뭔가 맞지 않지만, 국가 주도의 산업성장 시대도 아니고, 국가의 부가 GDP만으로 해석되는 것도 한계가 있고, 바라보는 틀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서부터 풀어나갈지 갈피를 잡아보고 싶었어요. <주식하는 마음>은 그저 팬심으로 골랐는데, 일하는 마음을 배운 훌륭한 책이었다면, <자본주의의 미래>공동체가 지속가능하기 위해서, 경제학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이론들이 낡았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목소리들에 지치는 이유를 그려낼 수 있네요. 어떻게 바꿔볼 수 있을지, 주주의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주주자본주의를 방치하는 경제학자들은 무능하거나 무책임하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매우 짜릿해요. 이 책. 


절반 읽은 채로, 급하게 #트레바리 #국경_디지털국부론 독후감은 이렇게 11시59분에 올렸습니다. <래디컬 마켓> 이후로 이렇게 생각을 흔드는 책도 간만인데, 너무 성의 없이 때웠군요. (국경, 즉 '국가와 경제' 클럽 이번 시즌 주제 '디지털 국부론'을 제가 고른거라.. 주절주절 갖다붙이고..ㅠㅠ)

이데올로기 대신 실용주의
 
책은 Y가 강추했어요. '좋은 시민',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나누다보면 만날 수 밖에 없는 책입니다. 옥스퍼드에서 공공정책학을 가르친 경제학자가 계속 윤리를 앞세우는 것도 희한한데, 분열된 세계의 복잡한 문제를 풀어갈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이데올로기적 접근 대신 실용적 해법에 집중합니다.


깊은 균열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피륙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다. 그러한 균열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불안을 그리고 새로운 분노를, 또한 우리의 정치에는 새로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11쪽)
이데올로기의 옹호자와 대중 영합주의자는 모두 새로운 균열이 초래하는 불안과 분노를 능숙하게 활용하지만, 그에 대처할 능력은 없다. 이러한 균열은 과거사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 나타난 복잡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러한 정치인들에게는 열정적인 약장수의 "치유책"을 행동에 옮기면서 어마어마한 피해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다. (17쪽)


저자는 이렇게 단언합니다. 이 균열이 과거와 다르다고. 공감하나요? 그 어느 때 보다 갈라진 세상. 분열 대신 통합을 말하는 이는 있어도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건 이데올로기의 옹호자, 대중 영합주의자 모두 무능하기 때문이란 겁니다. 또 공감하나요? 싸잡아 무능한 집단으로 놓고 정부와 정치에 무관심하게 만드는걸 좋아하진 않지만, 일단.. 냉정하게 보죠. 

마음 닿는 구절, 다 옮겨봅니다. 그럴만한 책이라 봅니다. 

우리에게는 적극적인 공공정책이 필요하지만 사회적 가부장주의는 실패를 되풀이했다. 좌파는 국가가 가장 잘 안다고 간주했지만, 불행히도 그러지 못했다.. 우파는 정부 규제의 사슬을 끊으면 이기심의 능력이 해방되어 모든 사람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는 시장의 마법을 터무니없이 과장했고, 덩달아 윤리적 제약의 필요성도 무시했다. 우리에게는 능동적인 국가가 필요하지만, 좀더 겸손한 역할을 수긍하는 국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시장이 필요하지만, 윤리에 단단히 뿌리박은 목적의식으로 통제되는 시장이 필요하다....

빌 게이츠가 좋아했듯, 저자는 자본주의 타파를 외치지 않아요. 고쳐쓰자는 겁니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목적 의식 분명하게. 이게 가능할까? 저자는 '사회적 모성주의'란 말을 가져옵니다. 권위적 가부장적 사회의 대척점에서 모성주의라 한걸까요. 

이러한 균열을 치유하기 위해 내가 제안하는 정책들은, 더 나은 용어를 찾지 못한 탓에 사회적 모성주의(social maternalism)로 이해하고자 한다. 사회적 모성주의에서 국가는 경제와 사회 영역에서 능동적으로 행동하지만, 노골적으로 자신의 권한을 휘두르지는 않는다. 국가의 과세정책은 수취할 명분이 없는 이득을 힘센 자들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하겠지만, 신난 듯이 부자들의 소득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넘기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의 규제정책은 경제적 진보를 가져오는 경쟁의 "창조적 파괴"로 인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보상받을 길을 열어주되, 자본주의가 본연의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하는 창조적 파괴의 과정 자체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의 애국주의는 사람들을 두루 결속하는 힘으로 작용하여 갖가지 불만으로 불거진 분열된 정체성을 다독일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추구하는 철학적 토대는 이데올로기의 배격이다... 이들 이데올로기 옹호자와 대중 영합주의자와는 달리, 20세기 성과를 이룬 지도자들은 실용주의자들이었다. (41~42쪽)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기적 사익 추구가 공익을 가져온다? 탐욕이 열심히 일하는 동력이 되고, 끝내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논리가 지금도 잘 작동하나요? 탐욕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경제 이론의 바탕이라고만 하면 서글프죠. 불평등은 임계선을 넘고 있고요. 저자는 "인간은 목적의식을 필요로 하지만, 자본주의는 그것을 마련해주지 못하고 있다.. 성공적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번영을 누릴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과 존중을 느낌으로서 만개한다"(47쪽)고 합니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1776년)에 앞서 1759년 <도덕감정론>에서 '사회 속에서 윤리적 동기를 가진 인간'에 주목했듯, 사회적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중시하고, 존중받고 싶어한다고요. (49~51쪽)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속과 존중을 느낀다는 것. 천관율 <시사인> 정치팀장은 지난해 코로나19가 드러낸 '한국인의 세계'- 의외의 응답 편에서  "민주적 시민성이 높은 사람들, 수평적 개인주의자들이 방역 성공의 주역"이라며 ‘자유로운 개인인 동시에 공동체에 기여하는 좋은 시민’에 대한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는 탐욕적인 '경제적 인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길은 오직 집단 속의 협력이었고...소속과 존중에 대한 갈망이 없는 경제적 인간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집단에 남도록 허용될 수 없었다"고요. "번영의 약속을 이루려면 서로를 존중하는 우리의 의식이 새롭게 구축되어야"하고, "많은 의무를 창출하는 데에 성공하는 사회는 권리에만 의존하는 사회보다 더 관대하고 조화로울 수 있다"는 겁니다. (81~83쪽) 우리가 방역에 성공하도록 한 '민주적 시민성'이 바로 이런 의무의 결과 아닐까요. 


'민주적 시민', '공동체에 기여하는 시민'에 대한 관심이 높은 건 현실세계가 그렇지 못한 탓이겠죠. 저자는 일자리 정체성과 나라 정체성을 언급하며, "복잡성이 증폭됨에 따라 특출난 교육을 받고, 상응하는 특출난 일자리를 얻으며, 특출난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나라를 으뜸 정체성으로 고수하는 사람들은 존중을 잃는다. 이처럼 격차가 생기면 그것 자체가 자신의 으뜸 정체성을 나라에서 일자리로 바꾸도록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부추긴다"고 말합니다.(92~93쪽) 불평등이 소소할 때는 승전국의 시민으로서 나라를 으뜸 정체성으로 삼는 모두가 행복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특출난 이들에 대한 존중이 나머지를 배제합니다. 국민 정체성을 고수하던 이들은 변두리로 내몰립니다. 'Make America Great Again' 이라는 트럼프의 구호에 많은 이들이 열광한건 나라를 으뜸 정체성으로 삼았다가 배신당한 마음을 달래줬기 때문인거죠. 

정치인의 자극적 선동 대신 마음을 달래고, 마음을 얻는 것. 결국 인간은 무엇으로 사느냐의 질문으로 다시 이어집니다. '좋은 시민'이 될 수도 있는데, 다들 각자도생으로 길을 잃는 시대. 저자는 여기에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소속감을 통해 의무를 수용하게 만들고, 행동의 목적까지 연결되어야 하는 건데, 곳곳에서 현재 작동이 잘 안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풀어야 할 과제죠. 

남들을 도우려는 의욕은 세 가지 이야기가 합쳐져야 생겨난다. 그것은 어떤 집단에 속한다고 느끼는 소속감을 공유하고, 그 집단 내의 호혜적 의무를 수용하며, 어떤 행동이 집단의 행복을 가져온다는 인과관계를 통해서 행동의 목적을 제시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공유 정체성이 무너지면, 이 소속과 의무와 목적의 이야기는 효력을 잃는다. 당연히 잘사는 사람들이 그들만 못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할 의욕도 무너진다. (95쪽)


국가는 그 어느때보다 소용 있는데..

전지구적 재난기, 우리는 약자를 보호하고 공동체가 위기를 이겨내도록 이끄는 정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2020년 신자유주의자들의 '작은 정부론'이 쑥 들어가고, 앞다퉈 '큰 정부' 얘기가 등장했습니다. 출생 전 임신기의 의료 서비스로부터 고령 연금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운영하는 나라 차원의 사회보험에 갹출금을 냄으로써 사람들은 서로를 지켜주기로 했다. 이것이 공동체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윤리이다. (87쪽) 이런 고전적인 의미에서 국가의 역할이 다시 부각됐죠. 재난지원금이 지원되고,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막대한 재정을 쏟아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봅니다. 과거 방식으로 큰 정부 가봐야 소용 없다는 얘기로 보입니다. 


지금 가장 영향력이 큰 反국가 이데올로기는 실리콘밸리의 자유 지상주의자들이 표방하는 것..세계적으로 성사되는 개인대 개인의 연결이 공간적으로 제약되는 국민 국가의 사회를 갈아치울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네트워크 안에서 누가 말하면 다른 누가 맞장구치는 메아리만을 듣는다.이야기들은 우리의 신념을 형성하는데, 이 echo chamber 들이 바로 그 프로세스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갈수록 더 생활하는 장소의 공유와 단절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적 단위는 여전히 우리가 생활하는 장소로 정의된다. 선거에서 우리가 행사하는 투표는 장소별로 집계되고, 우리의 정치 과정에서 생겨나는 공공 서비스와 정책도 장소별로 시행되고 전달된다. (69~70쪽)

페이스북 이용자가 중국이나 인도 인구보다 많다더라, 단순히 수치 비교할게 아닙니다. 정치란 지역 기반 선거로 작동하는데, 공공서비스도 그러한데, 우리의 삶은 온라인에서 끼리끼리 분열을 가속화합니다. 정체성은 오히려 쪼개지고 축소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500년 넘게 카탈루냐 사람이자 스페인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카탈루냐 사람으로만 돌아가려는 이들. 300년 넘게 스코틀랜드 사람이자 동시에 영국 사람이지만 이제는 스코틀랜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들. 150년 넘게 이탈리아 사람으로 살아왔지만, 이탈리아 '북쪽 사람'으로 정체성을 가져갑니다. 특징이요? 부자 지역이 가난한 지역을 떼냅니다. 공유 정체성이 무너지면 가난한 이웃에 대한 의무감은 약해진다는 저자의 지적은 이렇게 드러납니다.  50년 넘게 유고슬라비아 사람으로 살았던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분리를 성취했고, 그것이 여타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재앙적이었다. 50년 전 나이지리아에 참설의 전쟁을 초래했던 비아프라의 분리 운동이 또다시 선동의 바람을 타고 있다. (102-103쪽) 


자본가들은 공동체의 의무 대신 딴데만 관심 


분리주의 바람은 이렇게 국가를, 공동체를 쪼개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부자들을 다른 우주로 보내버립니다. 역시 균열의 틈은 더 벌어집니다. 

미국에서는 최고 경영자 보수가 같은 회사 노동자 보수의 20배였다가 231배로 높아졌다. 저자는 최고경영자들이 기준점을 자사 노동자가 아니라 다른 회사 최고경영자로 바꿨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500만 달러를 버는데, 나는 고작 400만 달밖에 벌지 못한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는 식이라는 겁니다. (135쪽) 최근 국내에서도 기업들이 수익을 직원들과 충분히 공유하느냐, 성과급이 적절하냐, 이걸로 시끄럽잖습니까? 모두 한 배에 탄 것 마냥 얘기하다가, CEO만 몇 백 배 보수를 챙기는게 요즘 세대의 공정 감각에 맞겠습니까? 

저자는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화학기업을 목표로 한다"던 기업이 90년대 들어 "우리는 주주 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고 변화한 사례를 듭니다. 정말 존경받던 그 기업은 결국 사라졌죠. 자본주의를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썩었다고 경멸하는 대중 정서의 주된 원인은 자꾸 나빠지는 기업의 행동에 있다고요.
주주들을 만족시켜야 연임이라도 바라보는 기업가들은 분기 이익률에 매달립니다. 당장 지출을 줄이는게 비결이죠. 결국 투자도 줄입니다. 후폭풍? 그건 자신의 임기 이후 일. 저자는 상장 회사 투자율은 2.7%, 비상장회사 투자율은 9% 라고 지적합니다. 
정반합, 혹은 백래시가 여기인들 없겠습니까. ESG가 요즘 화두가 된 건 이런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2017년 영국 학술원은 '기업의 미래'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는데 "기업의 목적은 자신의 고객과 노동력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방향을 다시 잡았답니다. 다시 '의무'란 단어가 등장! (121~123쪽)


그리고 대단히 흥미로운 모델도 소개됩니다. 영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로 새롭게 떠올랐다는 존루이스 파트너십. 
이 회사를 소유하는 주체는 회사 노동자들의 이해를 위해서 경영되는 신탁기금이다. 이러한 소유 방식을 반영하여, 회사는 이익의 큰 몫을 노동자들에게 연례 상여금으로 지급한다. 더구나 최고 경영자든 상점 보조원이든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회사 이익을 분배하는 상여금의 지급률은 최고 경영자나 상점의 노동자나 똑같다.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해서 모든 노동자가 발언권을 가진다. 그들의 발언권은 좁은 지역과 광역과 전국 차원에서 구성되는 다층적인 평의회를 통해서 반영되고, 회사의 의사결정을 주관하는 최고 평의회 위원의 80%가 선출을 통해서 정해진다. 존 루이스는 주주가 아니라 회사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노동자나 고객 같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상호 회사의 한 예이다. 새로 채용되는 노동자나 새로 확보되는 고객은 점차 그들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축적해서 퇴직자나 발길을 끊은 고객이 누리던 자격을 넘겨받는다. 즉 회사에 참여하고 그래서 회사의 성과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에게 소유와 통제권이 주어지도록 회사가 설계된 것이다. (143~144쪽) 요즘 관심사라 사이트까지 찾아가 구경하고 왔습니다. 


기업이 주주 이해관계 대신 의무를 갖는 것은 누구보다 그 구성원들에게 중요합니다. 당신 회사가 훌륭한 목적의식을 가지도록 고무하면 이는 행동 자체로 사회에 공헌하는 일. 반면 그런 목적이 없는 회사에서 계속 일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파괴한다. (161쪽)
영혼 없는 회사원이란 얘기들 하는데, 사실 영혼 없이 일하는건 고달프고 서글픈 일. 스트레스의 근원이죠. 좋은 기업에서 가치를 함께 만든다는 자부심과 비교할 수 있겠어요? 

자본주의의 미래, 구체적 제안은 이렇다 

저자는 각자 시민으로서 의무를 발휘하도록, 공유 정체성을 되살리고, 자본주의가 윤리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합니다. 

예컨대 페이스북, 구글, 아마존, 이베이, 우버 등 세계적 자연 독점으로 떠오른 기업에 대해 저자는 '대단히 위험한 존재들'로 봅니다.  일종의 공익 서비스처럼 켜저버린 글로벌 인터넷 서비스에 관한 규제 문제는 대단히 심각하다. 보통 세계적 대응이 필요하지만, 규제 능력은 압도적으로 국가 차원에 머물러 있다. 다수 국가가 협력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이유는 그런 인터넷 회사들이 압도적으로 미국 기업이기 때문이다.. (154쪽)
그렇다면 무엇이 통할까? 과세. 법인세율을 기업 규모에 따라 차등화하자는 논리.. 규모의 경제로 생기는 이득 가운데 일부를 사회를 위하여 세금으로.. 아마존 같은 새로 출현한 네트워크 독점자들은 세금 속임수 덕분에 오프라인 업계의 독점자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회피하면서 막대한 이득을 누린다.
 (157쪽)

동남권 메가시티 등 로컬의 역전, 어쩌면 로컬의 생존을 꾀하는 김경수 경남지사를 인터뷰해서 <힘의 역전>이라는 책을 냈죠. 저자 역시 이 문제에 진심입니다. 여러가지 대안이 나오는데.. 책을 보세요. 다만 
번영하는 도시와 망가진 도시 사이의 지리적 분단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공공정책을 조금씩 바꿔서 될 일은 아니다..해결책은 지리적 불평등의 축소를 달성하겠다는 포괄적인 정책 의지를 확고한 목표로 내거는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250~257쪽) 결국 의지의 문제이고, 이는 고도의 정치 행위가 필요합니다. 개발은행과 투자진흥청, 지식 군집(지역 대학교들) 역할이 강조되는데 지역 기반 대학과 기업의 공동 개혁을 주장한 김경수 지사의 구상이 새삼 떠오르기는 했어요.
고 리콴유 전 총리를 인용, "지가 상승은 경제 발전과 공적 자금으로 건설한 사회간접자본이 초래한 결과인데, 그로 인한 이득을 민간의 토지주들이 누려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248쪽)는 대목도 기록 남깁니다. 


또 압박에 짓눌리는 가정에 대한 지원,  보편적 공립 유치원 무상 제공..지원 거점으로서의 학교, 조직으로서의 학교.. 구체적인 얘기들이 나오네요. 뛰어난 대졸자들이 첫 수년 동안 일단 선생님으로 일하게 하는 영국 Teach First 프로그램. 양질의 교수가 부족한 지역에 도움될건 분명해보입니다. Teach Last도 있네요. 저자와 공동연구했던 암스테르담의 교수가 은퇴 이후 동네 학교 수학교사가 되어, 인생의 가장 보람된 시기를 보낸 에피소드도 나와요.
구체적 대안에 대해.. 구구절절 옮겨놓지는 않겠습니다. 책을 봅시다.


"지도자들은 모두 자기 집단의 신념 체계에 잘 들어맞는 이야기를 새로 보태고 정교하게 다듬는다. 그러나 위대한 지도자는 신념 체계를 통째로 만들어낸다"(76쪽)
어떤 정책이든, 단 하나의 정책으로는 절망을 바꿀 수 없다
(39쪽)고 합니다. 병든 자본주의를 고쳐서 윤리적 자본주의를 다시 세우고, 정체성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하도록 만드는게.. 참 당연하면서도 할 일이 많은 것 역시 당연해 보입니다. 누군가는 좋은 시민과 지속가능한 공동체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고, 누군가는 그에 걸맞는 제도 개혁을 고민하고, 누군가는 자본가의 역할, 정부의 역할을 각각 고민할 겁니다. 신념 체계를 통째로 만들어내는 위대한 지도자가 등장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해도 할 일을 않을 수는 없어요. 그러다보면 또 위대한, 좋은 시민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눈덩이처럼 커질 수도 있겠죠. 시장만 믿으라고, 모든 규제를 배척하고 정책 개입을 조롱할 일도 아니고, 자본주의를 경멸하며 탐욕을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좀 더 생산적으로 사고하고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보다 나은 방향으로 만들 기회가 왔다는 점에 집중해야 합니다. 기회, 맞아요. 이대로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이건 기회일 수 밖에 없어요. 윤리적 자본주의,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대안입니다.


책이 무척 좋아서.. 어르신들과도 다시 읽었고. 요약 발제 버전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모든 이야기는 결국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