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선 당신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컸다. 수백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어긋나도 그날 그곳에 나는 없었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만인에서 만물로 '당신'을 확장하면 이 만남이 더욱 귀하다. 그 사람을, 그 노을을, 그 길을, 그 책을, 그 노래를 만난 덕분에 나는 내가 되었다. 달라진 내 몸과 맘이 묻는다. 어떻게 당신이 내게로 왔지?
- 6쪽 작가의 말.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 남겼죠. "그대 옆에 있는 그 사람은 신이 내린 축복이다. 수십억년의 우주시간속에 바로 지금, 그리고 무한한 우주속에 같은 은하계, 같은 태양계, 같은 행성, 같은 나라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당신을 만난 것은 1조에 1조를 곱하고 다시 10억을 곱한 수분의 1만큼의 확률보다 작은 우연이기에….”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 이 한 마디가 사랑과 운명의 전부 같아요. 저는 고작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하지만, 탁월한 이야기꾼 탁환쌤은 다릅니다.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헤어나지를 못했어요. 제가 요즘 책수다를 떠는 [독서가와 행동가들 : 뭐 읽고 있니?] 지난주 클럽하우스에서 제 얘기를 들었던 태형님은 이렇게 정리해주셨죠.
"자칭 타칭 김탁환 작가님 덕후 혜승님의 픽.. 만랩 이야기꾼인 김탁환작가님이 일단 잡으면 손을 뗄 수 없는 이야기로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풀어낸 책이라고 합니다. 이 책 읽다 모더레이터 들어왔다고 빨리 클하 끝내고 가서 마저 읽어야 한다는 조바심을 막 드러내셨.( 뭔가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모드)"
네. 지난주 토요일 잡았다가 2권 들어갔더니 이게 또 추리물로 뒤통수를 쳐서.. 결말이 궁금해서 미칠거 같았어요. 클하 끝내고 결국 1시 반까지 다 읽고 숨을 헐떡였어요. 아니, 이럴수가!
열심히 살아왔으나 현재 남은건 열애 뿐. 그런데 소설은 유다정이 완벽한 남자 독고찬과 헤어지는 걸로 시작해요. "그가 내린 크고 작은 결정들을 단번에 지워버린 단 한 번의 결정. 집착이 미련으로 바뀌는 것은 늦게 깨달은 자의 불행이다."(29쪽)라면서요. 미국 함께 가자는 청혼이 뭐 그리 대단한 계기일까 싶기는 하지만 유다정은 '가방'에 얽힌 기억들을 풀어내며 진짜 가방을 만들기로 합니다. 사랑과 결혼 대신 사업을 택하는 여주인공을 결코 뻔하게 그리지 않는 것은 탁환쌤의 장기. 그녀가 기억하는 삶을 따라 쫓아가보면, 그녀의 매력적인 엄마가 등장하고, 어느새 이야기는 또다른 주인공의 삶으로 파고듭니다. 삼대가 소머리 국밥집을 하던 집안에서 가죽을 만지기 시작한 또다른 엄마와 소년. 1권은 계속 유다정과 소년의 이야기가 교차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 이야기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어떻게 사람을 홀리는지, 여자의 마음을 훔치는지 소년은 직접 듣고 깨닫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세 치 혀를 허락한 다음부터 나온 이야기는 몽땅 사랑 이야기야.... 잘 들어. 이 세상에 이야기는 딱 둘로 나뉘지. 사랑 같은 혁명이거나 혁명 같은 사랑! 그러니까 결국 다 사랑 이야기야."
결국 다 혁명 이야기란 건 훗날 깨달았다. (1권 138쪽)
지독한 사랑 이야기가 이어지고, 독자도 주인공도 이야기꾼의 이야기에 홀립니다. 투박하지만 아름답고, 거짓말같지만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달콤한 사탕처럼 가끔 등장합니다. 갈증을 일으킬 정도로, 빠져들다 감질맛에 흔들릴 정도로 예쁜 이야기들. 와중에 사랑을 나누는 이들의 농밀한 이야기가 겹치고, 이 소설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사랑은 사실 시대의 키워드가 아닙니다. 노랫말에서 'love'의 등장횟수가 50년 만에 반토막이 됐어요.
Why are pop songs getting sadder than they used to be?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춘향과 이몽룡의 목숨을 건 순애보는 10대의 몫이죠... 사랑이 영원하냐고요?
"사랑하니까. 영원히"
거기서 참았던 웃음이 터졌다. 뱅상이 불쾌한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지금 내 사랑을 비웃어?"
"비웃진 않아. 하지만 뱅상, 너도 네 사랑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쉽게 영원으로 치닫는 것 같아. 혹시 네가 부른 노래들에 '영원'이란 단어가 '사랑'과 나란히 놓였다면, 고치는 건 네 자유지만, 나 같은 사람도 있단 걸 알아줘. 난 사랑이 영원한지 확신을 못하겠어. 네 확신을 사랑이라고 내게 강요하진 말란 뜻이야"
"사랑할 거야, 영원히. 약속할게."
"영원은, 약속하는 게 아냐." (2권 61쪽)
어른의 이야기.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 "문제는 시간이 아니라 밀도다. 밀도가 전부다. 비컨에게 단 일 분이라도 몸과 마음을 다 쏟으려 했다"(2권 218쪽)고 할 수 있는, 사랑보다 자신의 꿈에 더 몰입하지만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 유다정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와중에.. 영원한 건 따로 있나봐요.
".. 그럼 가죽 가방에 목숨을 걸려는 네 길을 인정할게. 손에 익은 대로 자르고 붙이고 바느질하는 죽 선생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만들어. 팀을 짜. 저 운해를 닮은 팀! 무엇이든 품고 무엇으로도 바뀌는 팀! 회사 밖의 장인이 아니라 회사 안의 팀! 사람은 바뀌어도 팀은 영원해." (1권 226쪽)
사랑소설인데 주인공이 가방을 위해, 모든걸 다 걸고 뛰어든 여자잖아요. 우여곡절 끝에 같은 꿈을 꾸는 이들과 함께 팀을 짭니다. 근데, 이 대목이 이렇게 저를 흔들 줄이야. 한 10여년, 제가 떠들어온게, "마음이 통하는 이들과 함께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 보다 더 짜릿한 일은 없다"는 겁니다. 사랑? 그건 그거고요. 이것도 사랑이어요. 세상 모든 이야기가 혁명 같은 사랑이고, 사랑 같은 혁명이듯, 그거 결국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나를 새롭게 사랑하고, 세상을, 사람을 더 깊게 사랑하는 일이죠.
탁환쌤 전작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시간과 노력을 쏟는 대상에 대한 짙은 관심과 지독한 애정,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믿음이 특별한 경험을 만든다. 농부에게 그것은 논과 밭을 이루는 땅이고......매혹되지 않는다면, 마음을 주고받으며 신뢰하지 않는다면 어찌 평생을 머물러 살겠는가. 근대식 공장노동자나 도시의 월급쟁이는 결코 모를 고통과 즐거움이 그곳에 있다. (91쪽)
짙은 관심과 지독한 애정을 잃어버리기 싫어요. 그것이 무엇이든. 무뎌지고 지루해지기 싫어요. 이 사랑소설은, 다정한 이야기들은 휘몰아치는 전개로 사람을 흔들어요. 온 삶으로 집중하고, 내 존재를 오롯이 내던지는 사랑이 비현실적 이야기로 이어져요. 게다가 자신이 시작한 사업에, 자신이 차곡차곡 쌓아온 기억 속 가방에, 남다른 이야기로 존재가 분명해지는 그 가방들에 진심인 주인공의 도전이 남다르게 와닿아요... 결국 이야기는 읽는 이가 만들어가는 몫도 있잖아요? 제게는 유다정의 사랑도 사업도 몹시 구체적이고 생생합니다.
아, 근데요. 저는 결말에서 진짜 당황했어요. 이거이거... 아...ㅠㅠ
어느 순간 저처럼 가슴 콩닥거리며 진실을 쫓아가는 이에게 스포일러를 남기지 않고 설명하기 어렵네요... 어쩌겠습니까. 그래요, 그래요. 유다정씨, 지치지 말아요. 삶은 신비롭고 꿈은 아름다우니!
김탁환쌤 찐팬으로서, 역시 붙여놓습니다. 쌤 이번이 서른번째 소설이라는데.. 저는 못 본 것도 여전히 많고.. 기록을 놓친 것도 많고.. 음. 찐팬 맞나요ㅎㅎ;; <살아야겠다>,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도, <대소설의 시대>도 리뷰 남기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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