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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Dec 31. 2021

<라스트 듀얼> 강간은 남성의 재산권 침해였다

용감한 기사의 아내가 기사의 친구에게 강간당했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 남자는 목숨을 건 결투에 나선다. 그런데 이 주인공이 맷 데이먼이다. 뭔가 뻔한가?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다른 남자는 말한다. 그는 그리 대단한 기사도 아니었고 부인이 만족할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강간이 아니라 사랑한거다. 서로 다른 진실 앞에 두 남자가 벌인 결투,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라스트 듀얼’이 제목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진실은 무엇일까.


영화는 라쇼몽처럼 세 사람의 진실을 차례로 보여준다. 같은 장면에서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미묘한 차이가 결국 각자 다른 진실을 만든다. 14세기 여자의 삶을 보면서, 여자가 남자의 소유물에서 벗어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시 멈칫했다. 굳이 이 이야기에 대해 기록을 남기게 된 이유다. 이 영화의 원작은 중세 문학을 연구하는 UCLA 영문과 교수 Eric Jager 가 썼다. 참고문헌이 많이 남은 사건이다. 즉 실화다. 번역자가 테드 창 소설을 다 옮겨주신, 믿고 보는 김상훈 쌤. 결국 책까지 봤다.

 
14세기, 여자의 본분은 남자를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이다. 아이를 갖지 못했다면 여자가 남편과 관계에서 절정에 달하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 여자 잘못이다. 책에 따르면 서기 200년 경 그리스인 의사였던 갈레노스가 남기길, 수태의 필수 요소인 여성의 ‘씨앗’은 해당 여성이 오르가슴을 경험했을 경우에만 방출된다 했기 때문에 1000년이 지나도 그게 진리다.


나는 진실만을 말한다고, 강간당했음을 주장하는 여자에게 재판관들은 묻는다. 현재 임신한 것이 누구의 아이인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아이를 가진 것이니 강간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여자는 결혼 후 몇 년간 아이가 없었다. 주변 이들로부터 절정을 못 느껴 임신 못하는게 아니냐는 질타를 들었고 결국 법정에서도 다른 목적으로 추궁당한다. 여자의 존엄성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여자는 강간범을 고소할 수 없다. 그건 남자의 일이다. 이 부분에 대한 책의 설명은 이렇다.

“중세의 법전과 재판 기록들을 보면 강간은 중죄이며 사죄(死罪)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세의 수많은 시와 이야기들은 기사들이 우연히 마주친 신분이 낮은 처녀들의 처녀성을 무심하게 빼앗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으며.. 여성들은 실로 성폭행당하는 것을 즐기기까지 한다는 당대의 속설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론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중세 여성들은 많지 않았다...
강간범에 대한 기소와 처벌은 강간 피해자의 사회적 계급과 정치적 영향력에 크게 좌우되었다. 중세 프랑스에서 여성이 절도처럼 소소한 범죄를 저지르면 사형에 처해졌지만, 강간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남성들 다수는 단순 벌금형을 선고받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 벌금은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의 아버지나 남편에게 합의금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강간이라는 범죄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라기보다는 그녀의 보호자인 남성의 재산권을 침해한 기물파손죄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간에 남편이나 아버지, 또는 남성 보호자의 동의가 없으면 피해 여성은 범인을 고소할 수조차 없었다. ” (113~115쪽)


강간이 기물파손죄. 아내가 강간당한   카루주의 분노와 대응은 마냥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의 본성이 아니다. 그리고 오랜 악연이던 상대와 결투 기회를 얻긴 했는데, 영화에서는 아내에게 말하지 않은게 있었다. 남편이  경우, 그것은 강간이 없었다는 신의 판결이고, 위증을  아내는  채로 화형당해야 했다. 가해자를 처벌해달라는 여자의 호소가 본인의 화형을 저울  편에  일이 되어버렸다. 남자에게도 생사를 가르는 결투이지만 지켜보는  외에 아무 것도   없는 여자도 화형 여부를 기다려야 한다. 영화에서는 대단한 구경꺼리가 벌어져서  파리 시민들이  몰려나온 장면이 펼쳐진다. 아마 화형을 기대했을테지.

여자는 차별당했다. 형벌도 달랐다.
"1355 타생 오조라는 이름의 사내는 옷감을 훔친 죄로 한쪽 귀를 잘렸다. 1352년에  라프레보스트라는 여성은 절도죄로  채로 매장당하는 형에 처해졌는데, 여성은 같은 죄를 지어도 종종 남성보다 중한 처벌을 받곤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샤를 6세의 부인 이자보. 바이에른 왕가 출신인데 당시 프랑스 왕실의 법도에 따라 프랑스 궁정의 귀부인들 앞에서 옷을 벗고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전라 상태로 몸 상태를 검사받아야 했다. 출산에 적합한 체형을 갖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왕가의 정략결혼에서조차 여성은 출산 도구다. 존엄성?

<킬링 이브>의 여주인공 조디 코머가 연기하는 마르그리트를 지켜보면 그녀의 모멸감, 절망이 전이된다. 난봉꾼 르그리(아담 드라이버)가 잘 생겼다고 옛날에 말했다면 그게 죄다. 화형까지 각오하고 싸움에 나설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원작은 구체적 기록으로 손색없지만 영화가 각색을 잘했다. 광포한 귀족으로 나오는 벤 애플렉과 맷 데이먼이 의기투합한 영화. 벤 애플랙은 처음에 못 알아봤을 정도로 빌런 변신에 성공했다.

영화를 딸과 봤다. 비혼주의자 딸은 역시 냉소적 반응이다. 그리고 정부가 만든 출산지도 같은걸 내민다. 정부가 여성을 출산 도구로 집계하고, 지원 정책을 펼치는건 건 21세기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여자들이 미투 용기를 낸 것은 불과 몇 년 안됐다. 종종 성폭력이 아니라 화간이라는 비난은 진실 대신 사건을 다툼의 여지가 있는 채로 남긴다. 남자를 가해자로 모는 여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무고죄를 강화해야 한다는 대선 후보 공약이 등장하는 시대다. 나는 딸에게 그래도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딸은 그 변화가 더디다고 했다.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기록으로 남긴다. 역사가 여자를 어떻게 대했는지, 우리는 그 시대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무엇이 달라지고 달라지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여전히 맞아 죽고 목졸려 죽는 얘기가 뉴스로 나오고, 데이터폭력, 가정폭력은 흔한 소재다. 불법촬영물이라는 신문물은 인류애가 바스러지게 만든다.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소유물로 착각하는 이들이 지금은 없을까? 소유하지 못하는 분노를 다르게 투사하는 이들은 없을까? 14세기 강간에 얽힌 영화와 기록을 보는데 왜 나는 딸에게 미안함을 느끼는가.

책의 첫 대목 하나 덧붙인다. 인류 문명은 인류애를 기반으로 진화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을 거쳐 귀족은 사라지고 시대는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부분도 또 무엇일까.

"14세기, 이슬람이라는 공동의 적에 단결하지 않을 때 기독교국들은 왕위와 영토를 두고 끊임없이 다투며 전쟁을 벌였다. 수없이 많은 도시와 농지가 초토화되었고, 그곳에 살던 민중은 살해당하거나 굶어 죽었다. 거액의 빚을 지게 된 통치자들은 세금을 올리거나 주조하는 주화의 질을 떨어뜨려 자금을 확보했고, 급기야는 만만한 희생자인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기까지 했다. "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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