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이야기를 한다. 그녀에게 섹스는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의식이다.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서 이야기를 자신의 깊은 심연에서 길어올린다. 상처를 묻고 사는 인간은 그렇게 버틴다.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을 때 피하는 건 본능. 그녀는 이야기로 도피한게 아닐까. 상실을 딛고 가는 삶은 쉬운게 아니다. 그녀가 외도를 하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도 삶을 지탱하는 방식. 지독한 상실 이후의 삶은 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날 문득 끝나버리는 삶.
남자(가후쿠)는 아내(오토)를 사랑했고, 아내의 이야기를 아꼈다. 아내의 외도를 목격해도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서는 남자. 그에게 중요한 건 뭐였을까. 아내를 잃지 않는 것? 아내의 진실을 못본척 도망치면서 지키는 삶? 둘은 서로 알면서 모르는 척 진실을 피한걸까. 그렇게 지킨 삶이 껍데기라 오해하지 말자. 둘은 서로 사랑했다. 함께 가장 아픈 풍파를 넘겼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서로 정확하게 상대를 바라보지 않은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수용한 삶. 위태롭지만 부서지지 않는 상태에서 유지하는 삶.
또다른 주인공 드라이버 미사키. 알고보면 사연 없는 인간이 어디있을까 싶지만 또 남다르다. 그녀는 정직한 노동자로서 살아가는데 집중한다. 다른 나머지를 다 내려놓고, 미래를 미리 걱정하지 않은채 현재의 노동에 충실한 삶. 남자 만큼이나 미사키의 이야기도 까면 깔수록 깊어진다. 둘이 과거를 치유하는 조용한 여정은 지켜보는 이들을 빠져들게 한다. 각자 다르고 닮은 상처를 달래는 정중한 연대 같다. 꼭 사랑하고 열렬하고 손잡고 뛰어야 연대하는 건 아니지.
살아간다는 것, 이걸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의식하지 않는다면 날마다 지나갈 뿐이지만, 살아가는 나를 들여다보면 달라진다. 179분 짧지 않은 영화를 보면서 왜 사람들은 자기파괴적 성향을 가지게 될까. 각자 나름의 상처를 끝까지 깊게 들여다봐야만 삶이 온전한걸까. 상처란 왜 그냥 지워지고 묻혀지지 않는 걸까. 꼭 답을 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새삼스러운 질문을 다시 끄집어낸다.
남자가 미사키를 칭찬하는 장면의 깨달음도 기록해두자. 칭찬에 인색한 사람을 탓하면서, 나도 칭찬에 인색한 인간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인상적인 배우. 한없이 가라앉는 눈빛과 크게 변하지 않는 표정으로 상처를 품는다. 매력적인 건 아내 역할의 키리시마 레이카. 찾아보니 내 또래 배우다. 가냘픈 선과 알 수 없는 눈빛을 지녔다. 몹시 아름다워서 남자의 사랑이, 또다른 젊은 배우의 선망이 다 이해되어버린다. 영화는 그녀가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어스름한 빛은 그녀의 실루엣을 감싸고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 매혹적인 선과 빛에 홀리면서 시작해서, 내내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처음인데, 영화란 이런거였지 싶다. 왜 저 장면을 저렇게 잡았을까. 저 앵글의 메시지는 뭘까. 저 둘이 바닷가 계단에서 담배 태우는 저 장면의 적절한 거리, 담배를 들어올린 두 사람의 손, 아 정말 말이 필요없는 장면들이란. 터널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시선을 바꿔 보여주는데 왜 나도 애써 나의 심연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줄까. 수어 대사도 놀랍지만, 저 침묵은 삶을 좀 더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구나 등등 어줍잖은 온갖 생각을 이어나가게 해준다.
하루키의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드라이브 마이 카> 뿐 만 아니라 <기노>, <셰에라자드>의 에피소드를 빌려와 다르게 각색한 작품이라고. 이건 편성준님 글 '원작 소설로 영화를 만들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를 참고하시라.
나 역시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도 하루키에 빠졌던 젊은 날을 거쳐 어느날 하루키를 졸업했다. <1Q84>에서 결정적이었는데 내게는 그의 여성관이 너무 구렸다. 눈감고 넘어갈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는 법. 아재들의 로망을 구현하는 여자들. 여전히 그의 에세이를 좋아하긴 하지만 하여간에 그의 남주인공도 여주인공도 한결같지 않은가. 다른 작품에서 조금씩 떼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니. 각 작품에서 여자는 어떻게 그려졌을까 잠시 궁금하기도 하지만 굳이 찾아보고 싶지는 않다. 그게 아니어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데 충분하다.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인 남자 덕분에 영화는 체홉의 ‘바냐 삼촌’ 대사로 가득하다. 스물 몇 살의 나는 체홉을 좋아했는데, 왜 좋아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절의 내가 품었던 질문에 위안을 줬을까. 알 수 없다. 소냐의 대사는 영화에서 더 멋지게 다가온다. 수어여서 더 그랬다.
”바냐 삼촌, 우리는 살아갈 거예요. 길고 긴 낮과 밤들을 살아갈 거예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이 시련을 꾹 참고 견뎌낼 거예요..”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이런 질문을 덜 하고 살아도 좋을텐데. 나는 그저 그녀처럼 이야기를 길어올리고 싶었는데 재능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