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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Jun 15. 2023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홀렸다, 내셔널 갤러리 전시 갔다가

주객전도 전시 관람이었다. 원래 계획은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이었는데, 그것도 기분 좋게 잘 봤는데...

기왕 국립중앙박물관 온 김에 메소포타미아 전시도 볼까? 친구가 묻는데 급하게 대답했다. 넘 좋아!
근데 사이트 보니까 7월부터다. 아직 시작 안했나봐.... 일단 2층 사유의 방에나 들려 83호가 왜 78호보다 아름다운지 친구의 주관적 해설을 들은 뒤..어라? 3층에서 메소포타미아 전시 한다! 7월이..으아.. 2022년 7월에 시작한 전시다! 내년까지 하는구나! (좋다고 난리쳐도, 1년 되도록 하는지도 몰랐고, 안 보러 다녔던..)


지난 4월 영국박물관에서 의외의 발견이 앗시리아관이었다. 이집트와 그리스 문명을 얼마나 많이 약탈했나 구경하면서 은근 싸늘해진 내 맘을 흔들었다. 이건 진짜 못보던 건데? 와, 이거이거 피라미드 못지 않은데? 역시 메소포타미아! 인류의 기원이구나! 약탈품 몇만 봐도 놀라웠다. 작년에 그리스, 올들어 이집트, 스페인 남부의 이슬람 문명 흔적만 봐도 감탄하는데 역시 대단했다. 약탈품이라도 볼 기회가 생긴게 어디야?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가보기 어려운걸! (이라크, 이란, 요르단, 시리아, 제발 제발.. 정신 차리고 관광대국 가즈아아아)

이 전시는 메트로폴리탄 일부 소장품들. 거기도 많이 챙겼구나. 무튼 누가 글자 일부를 뜯어갔지만 Ur, 우르, 영국박물관에서 저 낯선 지명의 유물에 홀렸었다. 친구는 그 위의 Uruk 우룩이 이라크라고, 앗슈르는 시리아, 저기 어디가 이란이고.. 설명해줬다. 무려 바빌론을 다녀온 친구다.


실제 전시는 뭔가 작은 조각만 있나 싶은데, 자세히 보니 하나하나 탄성이 쏟아진다.
첫번째 점토판 조각은 무려 5000년 전 양조업자로 보이는 쿠싱이란 사람의 '맥아와 보릿가루 수령 내역을 적은 장부'다. 메소포타미아 초기 기록은 문자보다 숫자라는 친구 설명. 두번째 조각은 기원전 2043년 바빌리에서 열린 아키투 파종축제에 참여한 40여명이 신에게 제물로 올린 내역이다. 살찐 황소, 살찐 양, 최상급의 살찐 양, 양..이렇게 분류할 만큼 정확하다. 그 문명은 행정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던듯.
가운데 사진의 윗쪽은 약 4000년 전 판결문이다! 인류 최초로 함무라비 법전이 나온 동네답다. 아랫쪽은 처방전이란다. 기원전 약 9~7세기, 귀 치료를 위한 처방전과 '유령의 손' 증세, 즉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를 위한 처방전이란다. 식물, 무기물, 동물에서 추출한 원료를 활용한 치료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단다.

우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역량에 늘 감탄하는데, 저 석판들을 번역한 내용을 멀티미디어로 볼 수 있게 했다.


황소 장식 그릇 조각은 무려 4900~5300년 전 물건이다. 힘을 상징하는 황소는 그릇, 가구, 악기, 여기저기 쓰였다. 두번째 장식은 약 4000~4100년 전 물건, 오른쪽 황소 머리는 현악기에 달았던 것이란다. 악기는 소의 울음을 닮은 저음을 냈을거라는데, 이거 꿈보다 해몽인가? 이 즈음엔 이집트에서는 쿠푸의 대피라미드를 올렸고.. 문명이란.


그 시절 사람들은 원통형 인장을 목걸이나 팔찌로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저게 무척 작다. 두 손가락 좁혀서 사이즈 보여줄 정도로. 근데 그 인장을 점토에 찍으면 섬세하고 화려하다. 약 4200년 전 회녹색 인장은 결투 장면을 새겨놓았다. 근육의 세부까지 공들여 표현한 저 인장의 주인은 이쉬리-일룸이란 사람이다. 수천년 세월에 이름을 이렇게 남겼다. 붉은 인장은 3200년 전 벽옥으로 만들었다. 새 머리의 정령을 새겼다. 마지막 인장은 기원전 약 18~17세기 작품으로 오른손에 철퇴, 왼손에 초승달 모양의 칼을 든 이쉬타르 여신이란다.
역시 인장이든 도장이든 뭐 하나 파야하나. 이런 예술작품을 일상 소품으로 쓰던 그분들이 멋지구만.


4350~4600년 전의 왼쪽 조각은 봉헌용 상이다. 눈썹과 눈은 조개껍데기, 청금석, 또는 다른 귀금속으로 상감 세공했을 것이고, 초기 왕조 시대 유행이던 겹겹 치마를 입고 있다.
오른쪽도 나름 왕이시다. 도시국가 라가쉬의 왕 구데아(기원전 2150~2125년 재위). 오른팔의 다부진 근육은 신체 건강함을 드러낸다는 설명. 신전 재건을 기념하려고 만들었다는 내용이 저 치마에 슈메르어로 적혀 있다고 한다. 이분이나 저분이나 다들 치마 차림이다.


그 시절 통치자들은 자신을 '건물을 짓는 사람'이라 했다는데, 바구니를 이고 있는 것은 신전을 짓는데 쓸 첫 벽돌 제작을 기념한다고. 우르 제3왕조 통치자 우르-남마(기원전 2112~2095년 재위). 오른쪽 두상도 역시 통치자. 구리 주조라는 혁신적 기술과 비싼 재료를 썼다나. 약 4000~4300년 전 작품으로 이란에서 출토됐다.


우르의 1237호 무덤은 시종 74명이 묻힌채 발견됐단다. 그중 68명은 여성. 그들이 썼던 목걸이와 핀이다. 4500~4600년 전 무슨 일이.. 오른쪽은 기원전 1307~1275년 왕이었던 아다드-나라리 1세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제 낫칼이다.


황소 못지않게, 개도 메소포타미아 예술에 자주 등장한단다. 3000년 된 점토 맹견상. 그보다 몇백 년 뒤의 말과 마부 부조상. 차림새와 머리 모양을 보면 앗슈르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란다. 조공을 바치는 외국 사절단. 그 동네가 그랬다. 그 시절에. 개는 귀엽고, 저 부조는 정교해서 경이롭다.


이쉬타르 여신을 상징하는 사자다. 이같은 사자상 120구가 나부쿠두리우푸르 2세가 세운 이쉬타르 문에서 쭉 이어졌단다. 이쉬타르의 문이라니....


이쉬타르의 문을 복원한 건 정작 베를린. 오스만제국과 독일이 사이 좋을 때 발굴해서 약간 스몰 사이즈로 복원했다고. 남아있는 유일한 바빌론의 문이다. 오른쪽은 당대의 모습 추정한 건데.. 아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란.  


수메르어로 상자를 뜻하는 '쿠시룩', 미디어큐브, 영상으로 구현한 전시인데 훌륭하다.


비옥한 초승달의 땅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세계 최초로 문자를 만들고, 도시국가를 세웠다. 어떤 사회였을까? 로마와 그리스, 이집트를 다녀왔더니, 현재 가보기 어려운 지역이다보니, 더 보고싶다. 그 문명의 후예들이 간단한 분들이 아닐텐데, 제발 평화를 되찾고 국경을 열어달라. 폐허만 남아있을지라도, 그 땅을 밟고 싶다.




#내셔널갤러리_명화전, 원래 목표였다. 사실 4월에 런던 내셔널갤러리 가서 고흐 해바라기를 비롯해 실컷 누리고 왔기에, 별 관심 없었는데. 친구가 콜했다. 묻지 않고 나갔더니 이 전시였다ㅎㅎ 어차피 4월 그곳엔 없던 작품들이다. 내셔널갤러리 구경 기록 약간 보면.. 역시 기록을 남겨야 한다. 기억 가물할 때 짱이지.

이번 전시에서 인상적인 건.. 뭔놈의 상징과 비유가 그리 대단하냐..


얀 스테인 Jan Steen 의 17세기 작품 '여관'. 실제 얀 스테인은 네덜란드에서 여관을 운영했단다. 술에 취해 여관 주인 치마를 붙들고 있는 자신을 그려넣었다. 해설에 따르면, 그림엔 성적 암시가 가득하다고. '빨간 모자를 쓴 남성은 담배를 다져 넣으려 파이프에 손가락을 집어넣었으며, 그 옆 남성은 여관 주인에게 은근한 시선을 던집니다'?? 바닥에는 정력제로 유명한 홍합 껍데기와 잃어버린 순결을 상징하는 깨진 달걀이.. 와인 통과 막대기, 프라이팬 손잡이 역시 의미심장'하다는데, 진짜? 지이인짜? 이건 무슨 추리그림인가? 그걸 다 읽어내야 하다니. 그리고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음란마귀가 씌이지 않는한 저 프라이팬에서 뭐가 의미심장하단 말인가... 그림 좋아 보다가 깔깔 웃었네..

피에트로 롱기 Pietro Longhi 의 '기사를 맞이하는 여인' 역시 "두 하녀는 수를 놓는데 집중하는 반면, 여인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 위치에 있지만 하녀들의 성실하고 정숙한 모습과 대조되는..이처럼 상류층의 비도덕적 행동을 풍자하는 그림은 18세기 유럽에서 유행했..". 아니 저 여인이 뭘 했길래? 기껏 기사에게 귀기울이는게 비도덕적이라고?? 이분들 넘하신거 아닌가?

피터르 더 호흐 Pieter de Hooch 의 '안뜰에서 음악 모임' 설명에서도, 이 시기 미술에서 음악 연주는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는데.. 어우야..

'여관', '기사를 맞이하는 여인', '안뜰에서 음악 모임'

요아힘 베케라르 Joachim Beuckelaer '4원소' 물, 불, 흙, 공기.. 중에서 첫번째 그림은 불. 부엌의 화로 덕분에? 두번째 물고기 많은게 물. 그런데.. '불'에서 문 너머 안쪽이 성경 말씀. '물'에도 가운데 아치 아래 작게 보인다. 이번엔 두 작품만 왔는데. 네 작품 모두 성경의 한 장면을 숨은그림 찾기 마냥 넣어두었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 풍경에도 성서를 빼놓지 않고 살짝 남겨둔 것은 화가의 신앙이었을까, 당대 유행이었을까.

(이게 이번 전시에 없는 흙과 공기)


고흐의 작품은 이게 왔더라. '풀이 우거진 들판의 나비'. 1890년 작품이다. 고흐는 1889년에 정신병이 심해져 병원에 입원했고, 1890년 자살했다. 37세였다. 이 그림은 입원했을 당시 그렸다. 그림에 대한 인상보다, 고통으로 얼룩진 그의 삶을 떠올리며 괜히 머뭇거리게 되더라.


그림보다 사연에 더 마음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실물 사이즈로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영국 귀족 존 스튜어트와 버나드 스튜어트 형제. 이들의 대륙여행을 기념해 그린 17세기 인증샷이다. 그리고 3년 후 영국에선 국왕과 의회가 다투면서 전쟁(청교도 혁명)이 일어나는데, 국왕 친척이던 이들 형제는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그때 나이가 겨우 스물넷. 부와 권력을 누리던 청년들도 더 큰 권력들이 충돌하면 별 수 없이 희생되는구나.

오른쪽 그림은 이번 전시 표지모델인 일명 레드보이. 1대 더럼 백작 아들의 예닐곱살 때 모습이란다. 요즘 태어났으면 아이돌이 됐을 고고한 미모. 어린 녀석이 사람을 홀린다 싶은데, 열세살에 결핵으로 숨졌단다. 저 예쁜 아이의 초상화를 보면서 슬픔을 달랬을 그 부모 생각에 괜히 시큰하고.. 1967년 영국 우표에 실린 최초의 그림이라는데, 명예는 다 뭔 소용이람.


사람 거의 없는 메소포타미아 무료 전시와 달리 나름 비싼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관람객 90%가 여자들이다. 어딜 가든 여자들이 먹여살리는 문화 현장을 보면, 뭔가 기이하다. 절반은 어디에 있는가. 난 친구 덕분에 문화인 놀이.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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