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다시 군산이었다. 몇몇 곳은 복습.
가을 군산의 황금들판을 만났는데, 정작 청보리밭으로 바뀌는 봄을 상상했다. 1년 전 군산에서는 수탈당한 과거사, 쌀 이야기에 꽂혔는데 이번엔 보리다. 군산의 꽁당보리.
빵굽는 #오남매 보리호두 찰식빵에 반한게 시작이었다. 밀가루는 고작 20%. 흰찰쌀보리 50%에 찹쌀과 타피오카 30%의 식빵은 쫀쫀했다. 손으로 찢는대로 쫄깃한 식감도 남다르지만, 풍미가 구수하다는 게 이런거지. 호두를 듬뿍 넣어 고소한 맛에 보리 내음이 향긋하다. 멈추지 못하고 계속 뜯어먹게 되는 부작용이 심각했다.
발음이 쉽지 않은 흰찰쌀보리, 일명 꽁당보리는 70%가 군산에서 나온다. 2012년 정부의 보리 수매 중단에 타격이 컸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건 군산시 사람들이다. 보리를 재해석하는데 진심이었다. 입맛 바뀐 요즘 이들에게 보리밥 혼식을 조르는 대신, 보리빵, 보리막걸리, 보리한과, 보리 제품 개발에 나섰다. 여기에 우리 고유 식자재와 음식에 이야기를 더하는 미식투어 전문가 안은금주 님이 가세했다.
80년대 광주에서 거북당 빵집으로 성공을 거둔 동유홍 사장님은 오남매가 모두 빵집에 뛰어들면서 #오남매 빵집을 군산에서 이어가고 있다. 그는 보리빵 개발에 8년을 보냈다. 찰보리는 글루텐이 없어 발효가 안되기 때문에, 발효종을 개발하는데 오래 걸렸다. 힌쌀찰보리 붓세, 찰보리 견과쿠키, 찰보리 만주, 찰보리 단팥빵 등은 100% 보리로 만든다. 단팥빵의 팥 앙금에도 보리를 섞어 덜 달고 질리지 않는다. 이제 전국으로 배송되면서 시장을 키우고 있다.
군산에는 이성당만 있는게 아니었다. 군산의 미식여행을 기획하고 발굴하는 안은금주님 덕분에 내 안목이 조금 넓어졌다.
점심에도 꽁당보리 비빔밥이었다. 식감이 거칠지 않으면서 찰지고 부드럽다. 남도에서도 산,들,바다의 고장 군산, 부안, 고창이 특히 음식이 좋다더니 #장국명가 밥과 찬은 뭐하나 빠지는게 없다. 군산맛집, 뭘 먹어야 하는지 딱 떠오르는게 단팥빵과 짬뽕 뿐이라면 아쉽지. 진짜 밥상이 행복을 부른다. 간장게장은 짜지도 달지도 않은 적절한 균형감으로 홀렸다.
저녁은 군산의 보리로 만든 맥주다. 군산시가 50억원을 들여 독일에서 장비를 들여와 맥아 공장을 세웠다. 이제 전국 17개 수제 맥주가 군산 맥아를 쓴다. 수입 맥아보다 맛은 생생하고, 로컬 재료를 통해 탄소발자국은 줄였다. 수협 창고를 개조한 군산 비어포트는 저마다 수제맥주로 승부를 겨루는 군산맥주 플랫폼이다. 이름도 예쁘다. 웰컴투군산라거, 어판장 라거, 째보선장 라거. 만월 스타우트, 탁류 스타우트, 해망굴 스타우트, 뜬부두 페일에일, 월명 IPA. 샐러드 위에 렌틸콩과 함께 보리 토핑 맞지? 1년 전에는 #군산맥주 기분좋게 즐겼는데, 금주 상태라 샘플러 마시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부디, 마실 수 있을 때 마시기를. #마냐여행
이런 사진이… 엉엉. 감사
다호 게스트하우스에서 책 원고 최종 교열 숙제하는 나..
2일차
군산 이성당 부근 도깨비시장은 구데렐라다. 이른 새벽 좌판이 펼쳐졌다가 오전 9시면 사라진다. 새로 고층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역전중앙시장 주변 노점상들이 쫓겨나자 벌어진 일이다. 저마다 살뜰하게 키운 채소, 걷어올린 수산물들을 내다판다. 일제강점기에도 열렸다는 얘기가 있으니 아파트보다 역사는 훨씬 깊다.
구경하는 재미와 일정상 사지 못하는 고통이 동시에 나를 덮쳤다. 손바닥보다 큰 민물 말조개는 하나가 아니라 한 바구니에 7000원. 흙냄새 향긋한 연근, 생강, 도라지도 마트에서는 보기 힘든 아이들이다. 펼쳐놓은 열무 더미가 4000원인데 3000원에 주시겠단다. 요즘 채소 물가가 미친 덕분에 후달리는 주부로서는 눈돌아가는 장터다.
안은금주님이 사주신 흑임자 떡에 이쑤시개를 꽂아두었더니 좌판의 아주머니가 하나 달라고 하셨다. 하나 더 달라고 하시더니 두 개 더 가져가셨다. 옆의 할머니가 "나도 달라"고 하신다. 녹진하고 고소해서 침 넘어가는 맛이지만 이 떡 어떻게 다 해치우지 내심 고민하던 내게 구세주같은 분들. 떡을 나누는 재미가 맛보고 구경하는 것보다 백배 신난다.
한가지 더 맛본 것은 으름. 속살은 바나나 같은데 쌉싸름 씨를 발라내기 귀찮아 꼭꼭 씹어 같이 먹었다. 대장금에 나왔다는 쪄낸 올게쌀도 한줌 입에 넣으면 간식 같은 곡물이다.
작년에 왔던 #첼로네시아, 다시 봐도 환상적 공간이다. 사과와 양상추를 듬뿍 넣은 크로아상 샌드위치와 마당에서 딴 탱자로 만든 에이드도 좋지만 여긴 공간의 힘이 대단하다. 마당 넓은 집에 세심한 정성이 더해지면!
군산에서 고창으로 이동하는 직선 노선 대신 새만금을 지나간다. 저기서 잼버리?!?! 땅을 넓히는게 최고였던 시절에 시작해 공장도 들어왔다가 떠났다. 노동집약적 1차산업, 2차산업의 시절을 지나 호남을 부강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됐던 플랫폼 새만금은 방향이 모호해졌다. 미식투어에 나선 김에 이 땅에 애정을 갖고 바라봐달라는 안은금주 님의 청. 땅은 어마어마하고 10년 뒤 어떤 모습이 될지 창의적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시행착오가 밑거름이 되도록 지혜를 모으려면, 애정어린 관심이 시작일게다. 휙 지나간다고 생길 것은 아니지만, 로컬에서 해법을 찾지 못하면 우리 미래는 조금 곤란할듯.
3000년 전 고인돌이 정말 무덤이었을까? 나란히 줄을 지어선 저 돌들은 어쩌다가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춘분과 추분, 하지에만 정확하게 태양을 담는 고인돌 각도는 뭘까? 혹시 별자리를 땅에 기록했다거나 하늘에 제를 올리는 자리는 아니었을까?
고창 고인돌 유적지에서 새로운 질문을 안고 간다. 고창문화연구회 이병렬 박사님 설명 덕분이다. 공원 입구 코스모스 들판이나 사진 찍는 고인돌 유적만 보고 가면 섭하지. 고인돌들은 언덕 위에서 내려봐야 한다는 걸 배웠다. 다르게 보인다.
언덕 너머는 운곡 람사르 습지로 이어진다. 갑자기 제주 곶자왈 못지 않은 울창한 숲이다. 뱀딸기라는 작고 예쁜 아이가 보이더니, 진짜 뱀도 나타났다. 다행히 나는 목격하지 못했다. 지저귀는 새소리가 고요한 숲을 외롭지 않게 만든다. 한마디로 영화 같다는 얘기다. 촉촉한 이끼로 덮인 나무 등걸에는 버섯들이 매달려 있다. 고창이 이런 곳이었다고?
저수지의 물이 영광원전 냉각수로 공급되면서 한때 계단논은 한 세대만에 원시 습지 상태로 돌아갔다. 수달, 황새, 삵, 구렁이, 새호리기, 팔색조가 산다고 한다. 정작 습지 공원 입구에서 제대로 걸으면 7시간 걸리는 길이라, 대부분 입구만 보다가 돌아간다니 매우 아쉽. 덜 개발된 여행지다. 우리는 그나마 고인돌 공원 쪽에서 올라가서 맛을 쪼금 더 보고 나왔다. 언제 제대로 돌아보고 싶다.
습지에서 돌아나오면 황금 들녁 논뷰가 끝내준다. 어디 가본 곳 없는 서울촌사람으로서 눈이 휘둥그레, 사진 찍느라 정신을 못차렸다. 그래도 사진으로 담기 어려운 고창미. 고창을 발견했다. #마냐여행
3일차
내가 영화 찍고 있는 기분? 아스라히 물안개 위로 해가 뜨고 있었다. 고창은 물안개의 고장이었다. 이른 아침 서둘러 나섰더니 산자락 아래로 물안개가 자욱했다. 어제 숲길만 보고 갔던 운곡습지 옆 저수지에서 아득한 시간이 흘렀다. 이런 선물이라니 안은금주 님 복받으실게다.
차로 조금 더 가면 선운사. 역시 아침이라 호젓한 산사의 풍경. 봄이면 동백, 여름에는 백일홍, 가을에는 상사화, 겨울에는 눈꽃이 피어난단다. 추사 김정희가 백파 선사의 입적 후 그를 기려 1858년 남긴 백파율사비는 저 숲 너머에 있다 하고..
선운사를 선운사만 보고 가면 안된다. 선운사 너머 도솔제 가는 길이 진짜다.
운곡저수지와 선운사 길. 고요한 아침 산책으로 완벽한 코스다. 이래서 속세를 떠나는건가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고창의 다른 매력도 정리하려다 본업 숙제 때문에 미뤘는데, 이 아침의 감동은 흘러넘쳐서 어쩔 수 없다.
빼먹은 이야기들
일단 사람 얘기, 따로 남겼다. 미당 서정주를 돌아보다보니, 이영춘 박사가 더 거인 같아 보였고, 임피역에서 달랑 몇 줄 만난 이들도 가슴에 남더라. 그리고 젊은 여성 배수연 응원.
군산 근대건축관. 조선은행 건물이다. 그냥저냥 볼만하다? 혹은 그때 그 시절 군산 거리 풍경을 사진으로라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고창 삼양염업사. 버려진 염전, 한때 미곡창고.. 쇠락한 한 시대의 유물이지만 오래된 공간은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드라마 <수사반장> 촬영도 이뤄졌다는데, 딱 그런 분위기.
그저 멋진 카페로 변신한다면 아쉬울 것 같고.. 이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그저 궁금. 나로서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생태공원이란 말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역시 10년 후 어떤 모습이 될까.
전북미식투어, 군산에 이어 고창에서도 불살랐다.
고창 인천강에서는 민물고기와 보리새우가 잡힌다. 50년 넘게 3대가 이어온 #인천가든 새우탕은 씹을수록 고소하다. 송사리탕도 궁금하지만 새우탕 대만족. 김치를 닮은 고창의 '짚장'도 손이 계속 간다. 찹쌀풀에 고춧가루와 메주가루, 꿀, 무, 고춧잎, 밤 등을 넣고 짚으로 덮어 살짝 발효시켰다. 보름 안에 먹어치워야 한다는데 새우탕과 더불어 밥도둑이다. 소식가 포쓰의 N님이 내 앞에서 밥 두 공기를 해치우셨다.
기대를 모았던 #우리풍천장어. 두툼한데 단단하다. 양념구이 없이 소금구이로만 승부하는데 고소한 감칠맛이란. 느끼하지도, 질리지도 않아 계속 계속.. 멸치볶음과 무김치 같은 기본 찬이 국대 급이다. 비록 복분자주를 마시지 못해 뭔가 아쉽지만 장어탕까지 미션수행 기분.
어디서 이런 집을 찾아내시는지 카페 #아르메리아 동화에 나오는 분위기. 샐러드도 맘에 들었고, 양배추 듬뿍에 감자샐러드 넣은 샌드위치는 정공법을 펼치는데 흡족했다. 평생 살림했다는 쥔장의 손끝에서 나온 온갖 수예품이 눈길을 붙들고, 원래 살던 집을 에어비앤비 숙소를 내놓았는데 오래된 집을 단정하게 가꾼 솜씨가 대단하다. 고창 예쁜집으로 기억해주고.
속이 탈난 분을 위해 끝내 #본가 백합죽을 공수해주신 세심한 안은금주님. 이거 맛보다가 다음엔 백합도 먹으리라 결심하고, 바지락이든 백합이든 이 동네 맛집들 잘된다는 소식이 괜히 좋았다. 고작 2박3일 만에 전북 팬이 된 기분.
#모양성순두부 1만원 하얀순두부에는 고등어구이, 손두부, 나물과 찬 6종이 나온다. 백합죽을 애피타이저로 먹고 순두부까지 든든하게 해치우면서 고창 여행에서는 하루 여섯 끼 정도 먹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리고.. 두둥. 이 컨퍼런스로 왔다.
이번에 만난 군산과 고창은 매혹적이었다. 이야기가 달랐다. 안은금주님이라는 렌즈가 그리 만들었다.
그냥 명소 구경이 아니라, 군산의 팬, 고창의 팬이 되도록 매혹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희로애락 속에 고군분투하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인간만한게 없다. 나는 그래서 보리 살린 군산시 이야기가 좋았다.
또한, 여행은 그냥 구경이 아니라 경험. 고창은 내게 이른 아침 물안개가 자욱했던 저수지, 고요했던 선운사 너머 숲길의 시간으로 기록됐다. 고인돌이 무덤이 아니라 별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그런게 좋았다.
무엇보다 이번 여행은 새로운 연결이었다. 잘 통하는 이들을 만났다. 즐거웠고, 다음이 기대되는 사람들. 그걸로 충분하다.
고창읍성도 아래 성벽만 흘깃 봤고. 가장 크고 예쁜 고인돌도 못봤고, 습지 투어도 선운사 산책도 맛만 봤다. 감질난다. 담엔 느긋하게 고창의 고요를 즐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