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타령 그만 해야겠다. 12.12 그날, 전두광은 강한 리더였다. 우왕좌왕 군부 리더들보다 나았다. 끝내 반란에 성공해 온갖 형님동생 잘먹고 잘살게 챙겼다. 진실 대신 거짓, 모략과 폭력으로 꿈을 이뤘다. 그의 리더십을 보는 게 끔찍하다.
장관, 장군, 뭐가 됐든 그 자리에서 밥값 못하는 이들이 꼭 있는데 어떤 경우, 역사에 죄를 짓는다. 그들은 명예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죄는 끝내 기록된다. 이렇게라도 남겨줘서 절절하게 고마운 영화다, #서울의봄. 몰입의 힘은 단지 빠른 편집과 긴장감, 명연기 때문만은 아니다. 결말 다 아는데도 저릿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심오한 질문을 가볍게 품는 나이가 됐다. 어떻게 살 지 결정하는 것은 삶의 보상이나 대가와 무관해서 숭고하다는 인친 댓글에 공감한다. 남들 말하는 성공이 추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진실과 정의가 때로 무력하다는 것도 안다. 반란 수괴는 이후 시민들을 공수부대의 총칼로 진압하고도 천수를 누렸다.
무고한 이를 쉽게 죄인으로 만드는 진짜 죄인들이 권세를 누리는 세상. 나는 그들에게 침 뱉고 욕할 자유를 누리며 살련다. 대신 이태신...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의 생애를 기억하겠다.
그가 보안사에 끌려간 뒤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가 1980년 4월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입학했던 그의 아들은 1982년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숨진채 발견됐다. 경찰은 자살로 결론냈지만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휘하 장교 450명 중 자리를 지킨 사람은 60여명. 나머지는 하나회의 밀명에 따라 반란에 가담하거나 자리를 비웠다. 최악의 상황에서 60명이 남았으니 실패했다기보다 비운의 리더. 그는 서빙고분실에서 두 달 간 고문에 시달렸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예편된 후 2년간 가택연금됐다.(이등병 강등은 정승화만. 장태완은 아니라는 반론 확인중) 1982년 전통이 허락했을 공기업 한국증권전산 사장직을 받아들인 속내는 잘 모르겠다. 제안한 전통 스타일만 짐작.
1993년 12.12 쿠데타 진상조사위에서 공개증언에 나섰고, 2000년 새천년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이 됐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후보 보훈 특별보좌관을 역임했고, 2010년 별세했다. 그의 부인은 곧이어 자살했다.
그를 잘 몰랐는데, 이젠 정우성 배우 얼굴을 덧씌워 기억할 수 있게 됐다. 미안하고 고맙다.
하나회를 해체한 YS의 업적은 나중에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
고, 하나회 해체 과정 새삼 궁금하다고 했더니 O온니가 바로 보내준 링크. 2013년 월간조선 기사다. 어제까진 별 관심 없었겠지만 #서울의봄 봤다면 잼나고 알찼다ㅎ
대통령실을 장악한 검찰, 특히 형사부가 아니라 특수부 라인. 검찰의 하나회 같은 저들에 대해서도 언젠가 이런 기록으로 보겠지. 똑닮았다.
- YS는 후보 시절부터 12.12 피해자 정승화 전 육참총장과 교분을 갖고 사조직 폐해를 뿌리뽑는 숙군 청사진을 갖고 있었다.
- 87년 대선에서는 군인 부인까지 노태우 후보 지원에 동원됐다.
- 92년 대선, 노통의 민자당 탈당 및 중립선언으로 방향을 잃은 기무사가 YS에 소극적으로 대하다 화를 입었다(기무사가 여당 후보 안 도왔다가 이리 됐다는 표현 자체가 흥미)
- 93년, 육사 31기 동기회장 선발 과정에서 하나회 비하나회 술집에서 난투극 벌일 정도였고
- 같은해 하나회 명단 살포 사건ㅎ 이런 일이!
- YS 정부 출범 5개월, 하나회 장성들의 쿠데타 모의 관련 안기부 정보보고로 난리났다가 해프닝으로 끝났는데, 이건 알고보면 기획된 사건?
- “군이 과거에 무슨 큰 혜택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제는 군 스스로 목소리를 내 국민에게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반발도 있었지만 끝내 전역시켰다.
- 5.16도 군의 하극상 사건으로 출발했다.
- 박통 때 하나회 수사했던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5공 출범 이후 삼청교육대로 보내져 가혹행위 당했다.
- 노통의 온건·유화적인 북방정책은 하나회 내부의 전-노 라인 내부 갈등을 가져왔다. 뭐가 먼저인지.
- 동기회 등 건전한 사조직 vs 이익집단으로 변질되는 음지의 사조직. 온갖 네트워크와 인맥 모임이 변질되지 않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