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여행 산책

안동 '리미티드 에디션' 전통의 맛과 멋 나들이

by 마냐 정혜승


시작은 손님맞이 웰컴 감주였다. 그냥 밥알은 가라앉지만 미리 전분을 뺀 하얀 밥알을 따로 동동 띄워주는 정성. 여정의 피로를 풀어주는 안동 수애당의 환대는 달달했다.


식생활 소통연구가 안은금주님이 기획한 안동 고택 나들이였다. 지난 3월 무섭게 덥친 화마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안동시 임동면. 하회마을에서 1시간 남동쪽, 앞산까지 밀려든 불의 공포는 지나갔지만 여행자의 발길이 사그라졌다.

(당시 상황에 대한 안은금주님 기록)


앞산 갈쌕 띠는 타고 남은 흔적이다.

안동 지역 음식 마케팅을 십수년 거들었던 안은금주님은 예전과 다른 각오로 안동 전통 문화를 알리려는 이들과 다시 연대했다.

온갖 체면에 이 눈치 저 눈치 볼거 많은 동네. '언니'들은 불지옥을 겪은뒤 "인생 뭐 있냐"며 빤빤해지기로 했다고. 고이 모셔놓기만 했던 놋그릇을 다 꺼내 20명의 여자 손님을 맞이했다. 남자들이 폼잡는 동네에서 여자들이 각잡고 대접받았다.


누가 경상도 음식을 타박했나


1인1소반 앞에는 직접 수놓고 다림질까지 말끔한 방석. 20개의 상차림마다 놋그릇 뚜껑까지 다소곳하다. 섬세한 환대다. 여기에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를 숭배하는 독자로서 책에 나오던 안동음식 로망을 원없이 풀었다.



찬 뚜껑을 열어보니 일단 간장. 진하게 짭쪼름한 진짜 간장이 향을 낸다. 씨간장에 매번 새 간장을 부어 연식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간장이다. 흔하게 먹어본 적 없는 맛이다. 역시 장맛이 먼저다.


후각을 간장이 잡아챘다면 눈길 먼저 가는건 미나리 콩가루찜. 보통 정구지(부추)나 양파대, 마늘쫑도 쓴다는데 지금 계절엔 돌미나리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초록의 맛이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완벽한 맛. 푸른 것을 소금과 콩가루 섞어 조물조물 찜기에 찌다가 콩가루 익어가며 메주 맛이 날 때 넓은 채반에 옮겨 수분을 재빨리 날리고 깨소금 참기름으로 덖어준다고. 찬은 검소하고 말은 쉽지만, 공정은 고된 시간을 갈아넣는 식이다.

백김치 국물은 마를 갈아넣어 풍미가 깊고, 육질이 단단하고 쫄깃한 돔배기(상어), 사각 식감 살아있는 마전도 훌륭하다. 여기에 상추전이라니. 평소 제철 채소 뭐든 전으로 부쳐낸단다. 전통 음식 연구자 정희선 숙대 교수님 설명으로는 상추떡(와거병)이란 것도 있다니 놀라워라.

첫번째 메인은 떡국이다. 이날 상차림은 안동으로 시집오는 며느리 신행 음식. 지금은 수애당 안주인이지만 원래 대기업 다니던 도시사람 문정현 쌤이 직접 겪고 맛본 것들이다. 집에 들어서며 복이 들어오라고 박을 발로 밟아 깨트리는 것부터 시작해 그 새댁은 진수성찬 속에 소복히 담긴 떡국을 어떻게 삼켰는지 당황한 마음만 기억한다. 이날 스무 그릇 내면서도 불지 않도록 떡을 뽑아낸 것은 인근 정미소 고수의 솜씨. 썰어낸 건 안주인 공이다. 황백 지단에 쇠고기와 김 고명까지 작은 그릇이 완벽하다.

두번째 메인은 헛제사밥인데 전주 류씨 문중에서는 고명이 국수다. 역시 콩가루에 간간하게 무친 국수. 연녹색 야들야들 부드러운 고사리, 제법 쌉싸름한 도라지, 향 좋은 고추잎 무침이 어우러진다. 손 많이 가는 나물들이 존재감을 뽐내는데 이미 간이 완벽해도 간장 살짝 얹어 먹으면 또 맛이 다르다. 떡국으로 배가 불렀지만 남김 없이 싹싹 해치웠다. 경상도 음식 예술이라 해야하나. 그저 안주인 솜씨인가. 집 앞에서 따온다는 체리도 영롱했다.


문중의 맛과 멋은 그녀들 몫


1500년대 안동에 터잡은 전주 류씨 집안. 1939년 수애당을 지은 것은 독립운동하던 할아버지 류진걸 선생이다. 자자손손 뼈대 깊은 이 문중의 맛, 멋을 전통 콘텐츠로 만든 건 여자들이다. 도시 며느리 문정현 쌤은 처음에 시장도 못간단다.

"야야. 밭에 다 있는데 왜 가니", 시엄니 말이 아니더라도 밭에서 풀뽑을 시간도 부족했단다. 이제 그는 텃밭 채소의 마법사다.

또한 그는 방에서 놀고만 있냐는 시부모 눈치 속에 천리안 하이텔 농가 민박 홍보를 시작해 이른바 '고택 스테이'를 선도한 선구자. 안동 지역 종가집 며느리 형님들을 모아 종부협동조합을 만든 이다. 여자들에게 내것이라고 없는 동네에서 ‘우리의 것‘을 지켜낸 이다.

뵙게 되어 기뻤어요ㅎ


정신문화의 수도, 가부장 유교의 본산인 지역에서 그 세월은 물어 뭐할까. "내가 낸데", 모두 잘난 분들은 "내가 몇대 후손인 줄 아느냐"고 하는 동네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번에 마음을 바꿨단다. 현실도피하고 위신이 중요한 바깥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내 삶을 살아야겠다"는 안주인들의 결심. 고택 스테이 외에도 뭐든 도모하기로 작당했다. 덕분에 우리 일행이 환대받았다. 막내가 50대인 이들의 문중의 전통 소개가 언제까지 가능할지 아무도 모른다. 덕분에 이들이 선보이는 것들은 모두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수애당 옆 서당


조선 초기 요리책 [수운잡방] 집안의 후손이자 정재종택 종부인 김영한 쌤은 문정현 쌤과 의기투합했다.

수애당 인근 서당을 구경한뒤 차로 조금 이동하면 정재종택이다. 대대로 내려온 송화주를 맛볼 시간. 근데 내가 더 흥분한 건 보푸름이다. 명태의 살을 실처럼 긁어내 만든다.

삼색 보푸름


‘형태가 드러나지 않을 만큼 결이 고와야 하지만 젓가락으로 집히지 않아서는 안 된다. 혀 위에서 녹아들어야 하지만 가루가 돼서는 안 된다. 짜지 않아야 하지만 싱거워도 안 된다. 고소한 향이 풍겨야 하지만 기름기가 입에 걸려서도 안 된다. 그게 보푸름이 앉아 있어야 할 정밀한 좌표였고, 그 지점을 가장 섬세하게 맞출 줄 아는 사람이 엄마였다.‘ [외로운 사람끼리 배추적을 먹었다], 108쪽


감히 만들어볼 엄두가 나지 않지만 몹시 궁금했던 보푸름을 여기서 만났다. 당귀와 고추기름을 써서 초록색, 붉은색 삼색 보푸름이다. 상상 이상 보드랍다.


원래 송화가루로 만드는 송화다식은 산불로 재료를 구하지 못해 들깨가루로 구현했다. 직접 양념하고 말린 육포, 잣을 곁들인 곶감, 백앵두까지 안주가 곱디 곱다. 술은 끊었지만 맛보지 않을 수 없는 송화주. 솔잎과 국화 향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룬다. 술빚는 비법은 300년 구전으로 맏며느리에게만 전해졌단다.


우리는 종부님 알려주시는대로 송화주도 직접 빚었다. 쌀알이 으깨지도록 한참 손을 비볐다. 소나무와 국화 향이 난리다. 100일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데 과연. 술은 계절 따라 맛이 달라 곱디 고운 귀부인 카리스마의 종부님께도 늘 어렵단다.


서원 누각의 오후


수애당, 정재고택에 이어 우리의 선택은 묵계서원. 안동의 명소 병산서원과 닮았으나 아담하다. 병산서원에서는 오르지 못했던 누각에서 앉았다 누웠다 실컷 정취를 즐겼다. 여기 서탁에서 책을 읽으면 행복하겠다. 나무향기와 비내음이 섞여 함께 맑아지는 들숨과 날숨. 생의 고즈넉함이 손에 잡힐듯 한 시간. 서원의 정취. 완벽하네.

서원 바로 앞의 나무들이 검게 그을렸다. 화마에서 살아남은게 기적이다.


저녁은 동해에서 고등어를 지고 와서 소금을 뿌리던 '간잽이'의 아드님이 하는 간고등어 전문점 일직식당. 그 아버님은 정확하게 20g의 소금을 쥐었다지. 구이와 조림 모두 흡족했다.

식혜인데 무와 생강, 고춧가루가 들어간 안동 식혜도 맛봤다. 낯선 맛. 이런게 고향의 맛?

조금 이동하면 예쁜 찻집 거리. 그중에서도 미드레인지, 다양한 잎차, 허브차 프로페셔널 찻집이고 날좋으면 호젓함을 즐길만하다.


기차 타고 하루 나들이 괜찮은 안동. 이재명 대통령에게 고향 안동은 31.28%의 지지를 보냈다. 민주당 후보로는 역대급 기록이지만 김문수 후보는 61.27%를 얻은 동네다. 위신과 체면이 여전히 중요하다는데 삐딱해지려다가 그곳에도 뭐든 해보려는 언니들이 있다는게 마음에 남는다. 자기 일 하는 여자들이, 자기 명의 차를 몰고 와준 덕분에 그 언니들도 대리만족하며 쾌감을 느끼셨다는 후일담을 전해들었다. 이렇게 또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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