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연로한 교수님 한분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님이셨는데 한국으로 학술행사 유치를 하고 싶어 하셨다. 국제위원회가 있고 2년마다 개최되는 '세계 구조 및 다분야 최적설계 학술대회'로 브라질에서차기대회 유치 프레젠테이션이 예정되어 있던 시점이었다. 기계, 건설, 항공 우주, 환경 공학 쪽의 뜻있는 교수님 몇몇이 유치전을 펼치고 있는 와중에 임시 추진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실체가 없었다. 행사를 추진할 자금 역시 없었다.
당시 회사는 해외 전시 실패로 경제적 타격을 크게 입고 인력이 줄줄이빠져나갔고 그 자리를 신입들이 채우고 있었다.회사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해 당장 자금이 들어오는 행사를 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팀장으로서 나는직원들에게 '꾸준한 일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했다. 교수님께 해드리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실체를 설계하고 건설을 해야 하는 3년에 걸친 긴 여정에 손을 내밀었다.
유치 제안서 작성을 위해서는 한국의 매력을 어필하는 콘텐츠와 행사의 기본계획이 포함되어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행사를 할 것이며어떤 절차로 참가자 등록을 받을지 등에 대한 계획이 필요하다. 우선 행사장 확보부터 시작했다. 코엑스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회의실에 예약을 해두고 인근 호텔과 객실 가격 협상을 진행했다. 논문 발표를 위해 참석하는 학도들이 제법 많은 학술 행사의 특성을 감안해 특급호텔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가격의 비즈니스호텔과코업 형태의 룸을 많이 확보했다. 그리고 연회행사를 비롯한 식사계획, 관광프로그램, 웹사이트 구축, 논문 접수 일정 등을 정리해 나갔다.
유치 제안서에 담을 내용 중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금 확보 계획이었다. 국제위원회로부터 자금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참가자 등록비 수입 외 현지에서의 협찬 유치와 후원금 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렇게 확보한 자금이 행사 예산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우리의 지원으로 구체적인 방안이 만들어지고 행사 계획이 문서라는 매개를 통해 실체화되자 유치 업무는 추진력이 생겼다. 보답이라도 하듯 교수님들은 행사를 유치해 오셨다.
추진위원회에 명단을 올린 교수님들은 서울뿐 아니라 대전, 광주, 부산 등 각지에 흩어져있었고 회의가 있는 날이면 사비를 들여 서울로 올라와 우리회사 회의실에 모였다. 홍보, 행사, 학술, 재무, 산학 등 각 분과를 맡은 교수님들은 바쁜 연구활동과 강의 외 시간을 행사에 쏟아부었고 회의에서 각자의 진행상황을 공유했다. 행사 실행과 관련해서는 경험이 전무한 교수님들은 우리의 의견을 경청했고 매 시점 우리에게 요청받은 역할을 충실히 따라주셨다.
협찬 활동을 일선에서 하고 계시는 교수님들을 위해 우린 기업체를 대상으로 한 협찬 패키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협찬제안서를 만들어드렸다. 우리 역시 국내에서 만들어진 '기획행사'가 아닌 '유치행사'라는 타이틀을 쥐고 한국관광공사와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후원금을 끌어모았다.
회사 경영기획실은 추진위원회 명의의 계좌를 만들었고 행사자금의 입출금 관리를 맡았다. 참가자 등록비와 협찬금, 후원금이 한 계좌에 모였다. 계좌 현황은 회의에서 모두 공개하고 우리 인건비와 대행수수료를 포함한 경비 등 행사 자금이 출금되는 시기 역시 위원회와 사전 협의한 계약 내용에 따라 집행했다.
회의가 있는 날이면 우린 저녁을 함께했다. 사무실 인근에 있는 저렴하고 맛있는 식당에 예약을 해두고 늦은 밤 교수님들이 배를 든든히 채워 지방으로 다시 내려갈 수 있도록 했다. 교수님들은 소박하지만 매번 다른 메뉴를 즐기는 행복을 누리셨고 늘 감사하다는 말씀을 잊지 않았다.
이 행사를 준비하는 기간 동안 회사는 이사를 고민했다. 당시 회사가 있던 곳은 대치동 포스코 빌딩 옆이었다. 누구든 오면 독특하고 예쁘다는 말을 한마디씩 하게 하는 건축상을 받은 건물이었다.
다달이 내야 하는 임대료도 부담이었고 떨어지면 일체의 경비를 회사가 떠안야 하기 때문에 경쟁입찰도 고르고 골라 참여했다. 경영기획실장이 월급 걱정을 할 때면 나는 내 월급을 미뤘고 팀원들 월급은 차질 없이 제 날짜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회사가 어려운 건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 월급도 제때 못 챙겨주는 회사, 일을 열심히 해도 비전이 없는 회사라는 불안감에 직원들이 동요되는 걸 원치 않았다. 진행하고 있는 행사들로부터 자금이 들어오는 시기를 조율해 가며 나는 회사 살림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일시적인 이사라고는 하지만 경영난을 해소하기 위한 극약처방이었기 때문에 환경이 좋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클라이언트와 협력사들이 수도 없이 드나드는 상황에서 회사의 이미지도 중요했고 좁은 업계에 불안정한 회사로 말이 나도는 것도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누가 불안한 회사를 믿고 몇 달, 몇 년씩 걸리는 프로젝트를 맡기겠는가. 누가 대금을 받지도 못할 수 있는 불안한 거래처의 오더를 받고 싶겠는가.당시 벤처협회의 대통령행사를 앞두고 있었고 고정거래처가 꾸준히 생겨나고 있던 상황이라 나는 이사를 원치 않았다. 몇 달만 견디면 자금상황이 좋아질 거라 예상이 되었지만 회사는 이사를 감행했다.
회사가 새롭게 터를 잡은 곳은 논현동이었다. 면적은 충분했지만 인테리어를 했음에도 왠지 모르게 싸늘한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실제 외풍도 심했다. 주차장은 턱없이 부족했고바로 옆 건물에 있는 큰 횟집에 드나드는 차들로 회사 앞은 늘 번잡했다.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클랙슨 소리와 술에 취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린 야근을 했다. 이름 있는 횟집답게 가끔씩 유명인들을 보는 재미는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이사 후 첫 회의를 위해 교수님들이 사무실로 모였다.
"회사가.. 어려운가요?"
갑작스레 옮긴 사무실의 모습을 본 교수님들은 당황했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이러다 행사 마무리를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셨을 건 분명하다.
이 행사는 철저히 내용에 집중했다. 학술행사는 특성상 화려함과 거리가 있지만 예산을 아끼기 위해 더욱 검소한 행사를 했다. 환영리셉션도 코엑스 1층에 있는 펍을 빌려 캐주얼하게 했다. 원래 펍에서 하고 있는 공연 시간에 맞춰 리셉션 프로그램을 짜고 마치 축하공연처럼 즐겼다. 수년간 같은 분야에서 연구하며 국경을 넘어 사이가 돈독한 학자들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고 처음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갑게 맥주잔을 기울이며 진지한 학문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장 스케치를 할 촬영기사 섭외 예산조차 아껴야 해서 직원들이 오가며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 전부인 행사였다. 그럴싸한 사진 한 장 제대로 남지 않은 행사였지만 어느 누구 하나 만족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 기업의 후원으로 한강 유람선을 타며 제공한 환송만찬이 유일한 제대로 된 식사였다. 유람선 선상에서 추진위원회 교수님들과 우린 3년간의 긴 여정을 마치며 해맑은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것 역시 핸드폰으로 찍은 거라 화질은 좋지 않다.
이 행사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정해진 예산을 받고 하는 행사가 아니었기에 여타 행사들과 다른 새로운 경험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가 두 번 바뀌는 동안 긴 호흡으로 유치부터 실행, 현장까지 전 과정을 함께하며 끈끈한 결속력이 생겼다. 추진위원회 교수님들의 수용하는 모습과 단합도 좋았다. 신입이었던 직원들이 이 기간을 거쳐 실력을 쌓아가고 승진을 하고 중요한 역할을 해 나갔다. 무엇보다 이 행사를 결심하며 내가 가졌던 바람대로 장기간에 걸쳐 하고 있는 일이 있었던 덕분에 그 기간 직원들의 이탈이 없었던 건 다른 어떤 것보다 힘이 되는 일이었고 큰 성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