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풍국 블리야 Jun 30. 2024

노무현 대통령의 약속, 마지막 115분

15. 전신거울과 머리빗

처음 대통령을 모셨던 벤처협회의 행사가 성공으로 끝나고 다음 해에도 우린 행사를 수주했다. 협회와 함께 하는 세 번째 행사인 덕에 모든 준비업무가 무난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사한 사무실에서 여름을 맞으며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벤처협회 사업팀장이 다급목소리로 전화를 해 왔다.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사무실로 찾아뵐게요."


짧은 통화를 끝내고 얼마 후 사업팀장이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청와대에서 행사계획을 올려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강연을 준비해 달라고 하십니다."

"강연이요?"

"네. VIP께서 벤처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특별 강연을 해 주시겠다고 합니다. 100분간요."

"100분이요?"

"네. 퍼포먼스 이후 강연이 들어가고 VIP는 퇴장하시는 순서입니다. 이후 시상식은 계속 이어져야 하고요. 문제는 강연 무대입니다. 우리가 계획한 출정식 무대를 배경으로 강연을 하실 수는 없잖아요. 강연 무대 어떻게 꾸밀지를 포함해 계획안을 올려달라고 합니다."


그해 우리는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벤처산업 10년의 성취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글로벌 출정식' 퍼포먼스를 준비 중이었다.


새로운 항해 출정식 콘셉트에 맞춰 디자인한 무대 시안


'강연 무대라.. 브레이크를 갖는다 하더라도 5분, 길어야 10분일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대를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더욱이 퇴장하신 후 원래 무대로 다시 되돌려야 하는데..'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포디움 뒤로 장식물 형태로 만들어 세울까?
(아냐 그럼, 풀샷이 잡힐 때 무대가 그대로 드러날 거야..)

백월을 미리 세워뒀다 밀고 들어올까?
(아냐 그럼, 레일을 깔아야 해..)

암막을 씌우고 레이저 영상을 써볼까?
(아냐 불을 켠 상태에서 레이저는 잘 안 보여. VIP의 시야에도 방해가 될 거야..)


혼자 질문과 답변을 이어가는 동안 내 시선은 회의실 창문을 응시하고 있다. 나를 잘 아는 사업팀장은 늘 그렇듯 이 순간도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허락하며 내가 어떤 해결안을 내놓을지 기다리고 있다.


"팀장님! 이건 어때요?"


사업팀장의 눈이 섬광처럼 반짝이고 내 입에서 나올 말에 집중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바짝 기울인다.


"블라인드요! 저 창문에 달린 블라인드요. 블라인드에 강연 타이틀을 넣어 제작해서 양쪽으로 밀어놓았다가 가운데로 펼치는 거예요. 무대팀이랑 구현이 가능한지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사업팀장은 그 길로 협회로 돌아갔고 나는 무대를 담당하는 디자인 실장과 아이디어를 주고받는다.


"팀장님. 블라인드로 오디토리움의 큰 무대를 가리려면 크기가 어마어마합니다. 블라인드가 흔들리면 행사 타이틀이 깨질 것 같은데요."

"아.. 그러네요. 이 크기면 무조건 흔들립니다. 그럼... 롤스크린은 어때요?"

"무대 크기의 롤스크린이라.. 돌돌 말아 올려 있던 상태에서 펼쳐 내리면 주름이 많이 가 있을 텐데, 그걸 펴려면.."

"안 되겠네요.. 그럼! 말지 않고 봉에 걸어두었다 그대로 내리는 건요?"

"공간이 될까요? 천 무게도 엄청날 거예요. 그리고 그 크기를 천 하나로 만들면 봉제 부분이 많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요."

"음.. 봉제 부분은 고민해 볼게요. 실장님은 천 무게가 얼마나 나갈지 확인 좀 해주세요. 오디토리움 천고랑 하중은 제가 확인할게요."


 20미터에 높이는 10미터가 훌쩍 넘는 큰 무대를 천으로 가리기 위해서는 크기뿐만 아니라 무게, 주름, 봉제선, 천고, 내려오는 시간 등 고려해야 할게 많았다. 다행히 오디토리움 무대 위 천고는 충분히 높았고 하중도 천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정도가 다.


"실장님! 롤 없이 봉에 걸어두었다가 그대로 내리는 걸로 시안 진행해 주세요. 스크린은 세 개로 나눠서 갑니다. 강연 타이틀이 들어갈 가운데 스크린 폭을 가장 크게 잡아주시고 좌우 스크린은 가운데보다 살짝 뒤쪽으로 일정 부분 겹쳐서 놓이게 잡아주세요."


특별강연 무대 시안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강연 무대는 해결이 되었지만 출정식 퍼포먼스 비품 정리와 특별강연 단상 세팅을 위해 브레이크를 갖는 건 불가피했다. VIP는 잠시 오디토리움 옆에 위치한 룸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무대 세팅이 바뀌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을 참가자들을 위해 10분간의 창작 뮤지컬을 구성해 넣었다.


퇴임을 몇 달 남겨두지 않은 시기라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는 나의 마지막 행사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행사를 잘 치르는 것 이외 다른 게 없지만 성심껏 잘 모셔드리고 싶었다. 비록 10분이지만 휴식하실 공간의 세팅도 고민이 됐다. 보통 VIP룸은 테이블에 생글생글한 꽃장식도 두고 커피, 차, 주스, 물, 그리고 다과 등을 준비한다. 대통령은 늘 도착과 동시에 행사장 입장, 그리고 식이 끝나면 바로 행사장을 떠나시기 때문에 한 번도 현장에 대기실을 마련해 본 적이 없었다.


비서관에게 선호하시는 가구와 배치, 그리고 음료와 다과는 어떻게 준비해 드리면 되는지 묻자 돌아온 답변은 평소 노무현 대통령답게 참으로 소박했다.


"가구는 있는 그대로 사용하실 거고,

음료나 다과도 따로 준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신거울''머리빗'만 준비해 주십시오."




"또 뵙습니다."


행사장 입구에 도착해 나를 알아본 노무현 대통령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하신다. 목례도 잊지 않으신다.


'내년에 또 봅시다' 했던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키셨다.



준비한 오프닝 영상과 친수 시상이 끝나고 글로벌 시장을 향해 새로운 항해를 시작하는 출정식이 이어졌다. 출정식을 통해 벤처는 향후 10만 개의 벤처 창업과 100만 개의 일자리 창출, 수출 1000억 불을 달성한다는 10년간의 로드맵을 발표했다.


10분간의 휴식 후 '혁신벤처기업인을 위한 특별강연'이 시작되었다. 포디움 옆에 앉으실 수 있는 테이블과 좌석을 준비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 긴 시간 동안 원고도 거의 보지 않고 선채로 강연을 이어가셨다. 재치 있는 언변에 웃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고 강연 중간중간 수차례 박수가 쏟아졌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첫 번째는 두 번씩이나 귀찮게 일어나셔서 박수를 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여러분들이 기업경영을 잘하셔서 성과가 좋은 바람에 참여정부가 은근히 편승해서 생색을 좀 낼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지요.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제게 강연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꼭 말씀을 드리고자 청하다시피 해서 초청을 받은 것은 나름대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장의 역할이 뭐냐’ 하는데 대해서 그동안에 많은 논란도 있었고 역사적으로 변천도 있었지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시장을 주도하는 세력이 세상을 주도한다, 그것은 아마 앞으로도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제는 역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는 주제를 가지고 시작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기업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문제에서부터 일단 출발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인할 때 저의 표어는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이, 그리로 가기 위한 길이 지금까지 제가 설명드린 기업 하기 좋은 나라의 내용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좀 달라 보입니까? 비슷해 보입니까?

- 혁신벤처기업인을 위한 특별강연 중


노무현 대통령과의 마지막 115분. 특강을 마치고 단상 아래로 내려오신 노무현 대통령은 한 명 한 명과 긴 악수를 나누며 '수고했다,'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촉촉해졌고 현장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눈가가 젖었다.




3대 정권의 대통령 행사를 경험한 나는, 컨벤션기획사로서 참여정부 때 행사가 가장 즐거웠고, 자부심이 높았고, 성취감도 컸다. 권위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개방했던 터라 기획자의 업무 부담을 줄였VIP 행사에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들이 가능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