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단풍국 블리야 Jul 07. 2024

모든 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6. 나만 힘든 줄 알았던 시간

회사가 이사를 하고 몇 달이 지나 신임 이사가 왔다. 웨딩사업체에서 CEO를 맡고 있는 사장을 수년간 보필해 온 오른팔이었다. 웨딩사업본업으로 하던 사장은 회사 살림을 경영기획실장과 사업부서장에게 맡겨왔다. 여행사업부와 전시사업부의 실적은 큰 변동이 없었다. 내가 이끌고 있는 컨벤션사업부가 회사 매출과 수익의 90% 이상을 채우니 사실상 회사를 이끌어가는 상황이었다.


사장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이사는 회사에 잘 나오지 않는 사장의 가교 역할을 했다. 이후 회사 설립 때부터 살림을 맡아오던 경영기획실장이 개인사정으로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갑작스레 회사를 떠났다. 새로 온 이사가 회사 살림을 이어받았지만 사업부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적극적인 지원을 해 주던 경영기획실장의 빈자리는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회사 사정을 잘 몰랐던 이사에게 사업부에서 하는 일과 경영기획실장이 해 주었던 역할에 대해 많은 대화를 했다. 이사는 말을 듣기는 하나 결과는 대부분 다른 방향으로 돌아왔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굉장히 고집스러웠다. 대화는 깊이 없이 맴돌았고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마치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듯했다.


대통령 행사를 연이어하며 회사의 평판이 높아져가던 즈음, 사장은 웨딩사업체 CEO를 그만두었다. 좋지 않은 일에 연루되어 그쪽 일을 정리하기 전 오른팔을 미리 이사로 선임해 회사로 보내둔 것이다. 웨딩사업체에서 손을 뗀 사장은 회사 일을 적극적으로 챙기기 시작했다. 시작은 청와대 미팅을 참석하는 것에서부터였다. 컨벤션 실무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장은 내가 부재중일 때 팀원들에게 직접 보고를 받기도 하고 업무 지시를 하기도 했다. 사장이 프로젝트에 개입하기 시작하고 내가 지시한 방향과 사장의 지시가 다를 때면 직원들은 혼란스러워했다.


그때 세계베스트디자인전국제회의⟩로 구성된 ⟪디자인코리아⟫ 행사의 입찰 공고가 났다. 2년 전 진팀장이 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제회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 그동안 크고 작은 행사들을 진흥원과 꾸준히 해오고 있었다. 나에 대한 우팀장의 신뢰 역시 단단했다. 때마침 다른 행사를 통해 사장과도 안면을 튼 분이 신임 진흥원장으로 취임을 했다. 진흥원의 신뢰를 받고 있는 실무진이 있고 뒤를 든든히 바쳐줄 힘이 생겼으니 사장으로서는 총괄대행 심이 났을 테다.

 

진흥원에서 몇 달 동안 근무하며 세계베스트디자인전을 함께했던 나는 그 행사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심지어  첫 번째 결과보고서가 내손에서 나왔다. 나는 현재 회사의 규모에서 총괄대행은 이르다는 의견이었다. 더욱이 세계베스트디자인전은 '명품 전시'로 호평을 받아오던 예술 전시에 가까운 행사였다. 해외 유수의 디자인상 수상작을 끌어모으고 작품 하나하나가 돋보이도록 디스플레이하는 기술은 일반 전시행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사업 규모만 보고 도전을 한다는 건 회사의 평판에도 행사의 성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하우가 없으면 손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전시 예산은 빠듯했다. 국제회의만 놓고 보면 수익성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내실 있게 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합대행사와 국제회의만 컨소시엄으로 가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나에게 휴가를 권했다.

"블리야 팀장,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회사 들어와서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지? 진행하고 있는 행사들 클라이언트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줄 테니까 일주일 쉬고 와."

직원들도 하나같이 "팀장님이 휴가를 가셔야 저희도 휴가 갈 희망이 생기죠."라는 말로 나의 휴가를 원했다.


돌아와 밀려있을 일을 생각하면 심난했지만 직원들에게 휴가 가는 팀장의 모습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휴가만 잡아두고 특별한 계획이 없던 친구와 태국 여행을 예약했다. 회사에 여행사업부가 있으니 필요한 준비를 알아서 해 주고 가격도 직원가로 받으니 휴가도 갈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나를 반겨준 건 총괄대행 입찰제안서를 준비하고 있는 직원들이었다. 사장은 반기를 들던 나를 휴가를 보내고 총괄대행 입찰을 밀어붙였다. 대규모 단기인력 채용공고가 나갔고 회사는 1년 만에 다시 이사를 하게 됐다.


사장이 택한 건 내실보다 규모였다. 컨벤션업계도 정치를 빼고 논할 수가 없다. 행사는 우리에게 왔다. 청와대 미팅에 몇 번 참석했던 사장이 행사총괄자가 되었다. 벤처협회의 대통령행사와 한 달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디자인코리아에서 입찰 당시 컨벤션사업부의 역할은 명확했다. 회사는 전문 홍보 대행사를 붙이는 것도 전시 디스플레이 전문가를 섭외하것도 받아들이않았다. 미진한 업무가 생길 때마다 진흥원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내가 방패막이가 되었고 마치 해결사가 등판하듯 그 일들을 떠안아야 했다.


디자인코리아가 끝나고 사장과 이사는 조용히 조직 키우기에 나섰다. 정확히는 '컨벤션사업부 키우기'였다. 사무실도 이리 넓은 대로 이사를 왔으니 다음 수순은 덩치를 키우는 일일테다. 좁은 컨벤션업계다. 나도 네트워크가 있으니 듣는 귀가 다. 당시 팀원 몇 명을 데리고 회사, 회사를 옮겨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옮겨 다니면서 몸값을 키우고 가는 회사마다 막대한 피해를 입혀 망하게 한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컨벤션업 이제 갓 발을 담근 사장과 이사가 사람 영입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이 귀에 들렸다.


소문뿐만 아니라 실력에 대해서도 좋은 평판을 들어본 적 없는 그 사람을 그것도 팀원들까지 그룹으로 회사에 들여 팀을 꾸리는 일에 나는 찬성할 수 없었다. 개인이 입사할 때와 그들만의 목소리를 가진 결속력이 강한 그룹이 입사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회사는 인재를 중용할 때 회사의 인재상과 기업문화에 맞는 사람을 뽑는다. 개인은 그룹 문화에 스며들기가 쉽지만 그룹이 들어왔을 때 모가 작은 회사는 재색을 잃고 흔들린다.


또한 몇 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회사의 재정적 위기를 함께 극복해 낸 직원들의 처우와 승진이 나에게는 우선이었다. 그간 회사를 위해 기여한 과장이 새 팀의 팀장이 되어야 했고 기존 직원들을 중심으로 조직개편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만한 자질이 충분히 있는 직원들이다. 연봉책정이야 내 권한밖이라 하더라도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짧은 경력의 사람들을 우리 직원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혀놓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걸 잊은 듯 사장은 급하게 서둘렀다. 이렇게 생긴 회사와의 갈등을 시작으로 내 모든 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신념도, 일에 대한 열정도, 사람에 대한 믿음도, 나의 사람들도.


조직개편을 두고 회사와 충돌계속되면서 나는 벽에 부딪혔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무능함만을 깨달으며 좌절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같이 휴가를 갔던 친구를 만났다. 시끄러운 선릉역 호프집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나를 짓누르고 있는 감정들을 조금이라도 내던지고 싶었다. 그때 부산에 있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코가 막힌듯한 목소리의 친구는 선뜻 말을 하지 못하고 내가 묻는 에만 "아니," "어"라고 답한다. 음악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묻혀 친구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나는 전화를 다시 하겠다 하고 끊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택시를 타자마자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여러 번의 전화에도 친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에도 답이 다.


친구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건 새벽이었다. 한 번도 그 시간에 전화를 한 적이 없던 친구다.


"응.. 여보세요.."

"블리야씨 되세요?"

"누구... 세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코가 막힌듯한 친구의 목소리,

그렇게 끊으면 안 되는 전화였다.


한 시간 지나지 않았었다.

친구는 한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끈을 놓아버렸다.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기력한 괴로움에 빠져

친구의 손을 놓쳐버린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우리 예쁘고 착한 블리야'라고 부르며 내편이 되어주던 친구.

스무 살에 만나 비껴가기만 하던 운명에 연을 만들지 못하고

긴 시간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았던 갈증이었던 사람.




바다가 좋아 부산으로 내려간 친구.

그리도 사랑하던 바다에 보내주기 위해 배에 올랐다.

뜨거운 열기가 마치 살아있는 온기처럼 내 손에 쥐어졌다.


친구는 떠나지 못했다.

통곡하듯 삐걱거리던 배가 바다 한가운데 멈춰 섰다.


"가지도 못할 거면서 왜 그랬어 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