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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국 블리야 Jul 14. 2024

신은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

17. 폭풍이 몰아칠 때

사장은 기어코 그들과 손을 잡았다. 그들의 수장이 컨벤션사업부장이 되어 나의 상사가 되었고 외교관 아버지라는 배경을 둔 한 명이 컨벤션 2팀의 팀장으로, 그리고 과장, 대리가 입사를 했다. 하나같이 회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고 이질적이었다.

얼마 후 사장은 '안식년 휴가제'를 도입한다는 발표를 했고 그 첫 번째 수혜자는 내가 되었다. 회사에 공적이 많은 직원에게 50%의 월급을 제공하는 두 달간의 유급휴가제라 하였다.


나를 휴가를 보내고 입찰준비를 했던 것과 같은 숨겨진 의도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이미 지옥에 있었다. 매일 숨을 쉬고 더 이상 전과 같지 않은 일상을 살면서 여전히 그들과 싸우는 일은 무의미했다.


마지막 통화가 있기 이틀 전 친구와 나는 한 시간이 넘는 긴 통화를 했다. 평소와 다름을 인지하지 못했던 그 통화를 곱씹어보며 내가 무엇을 놓쳤는지 생각했다. 늘 책을 놓지 않았던 친구는 이외수 작가의 글을 특히 좋아했다. 그날도 이외수 작가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지난 3년의 시간이 후회된다고 했다. 그리고 이태리에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태리에 가야 했다.

배낭을 챙겨 유럽으로 떠났다.

나를 괴롭히기 위한 고행과도 같은 여행이었다.

유럽땅을 걷고 또 걸었다.

성당마다 들어가 촛불 하나를 밝혀두고 빌고  빌었다. 

기도하고  기도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엇이었을까. 이태리에서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로마에서 마지막 며칠보내며 나는 고열에 시달렸다.




한 달 반을 그렇게 헤매다 한국에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빠의 투병소식이었다. 내가 유럽으로 떠난 직후 아빠는 암 진단을 받았다. 그사이 얼굴이 핼쑥해졌고 눈에 띄게 야위었다. 그래도 아빠는 아빠였다. 어리석게도 부모는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 존재라 믿었다.


아빠의 얼굴색이 달라진 것처럼 회사도 달라져있었다. 이사와 컨벤션사업부장이 사장의 양 날개가 되어 회사를 호령하고 있었다. 내가 복귀하자 직원들은 눈물부터 글썽였다.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팀장님이 돌아오시면 나아지겠지'하며 견뎠다는 직원들의 말을 들으니 속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싸움에 대한 회사의 대답은 '기획사업팀 팀장'으로의 발령이었다. 입찰행사가 아닌 자체 기획행사를 만들라고 새 팀의 팀장으로 발령하며 단 한 명의 팀원을 주지 않았다. 회사는 굽히지 않았다. 나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사장과 이사는 귀를 닫은 채 나를 피했다. 사람을 똑바로 보지 않는 컨벤션사업부장은  곁눈으로 나를 훑어보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부터 힘이 미비했던 전시사업부장은 내 앞에서 마냥 깊은 한숨만 쉬어댈 뿐이었다.


주변사람들은 하나같이 '떠나야 할 때'를 언급하며 '너의 역할은 끝났다,' '처음부터 그들의 목표는 이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회사 살림을 이끌던 가장에서 돌연 쓸모를 다한 '필요했었던 사람'이 었고 내가 키워놓은 팀과 클라이언트들은 다른 사람 차지하고 있었다.


몇 번의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하며 진심을 다해왔던 회사가 나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버틸 힘이 없었다. 더 이상 버티고 싶지 않았다. 사장은 대통령보다 만나기 힘든 사람이 되었다. 나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며 이리저리 피하던 사장에게 전화로 퇴직 의사를 밝히자 다음날 회사에서 만나 이야기하자는 말이 돌아왔다.


다음날 출근을 나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다.  컴퓨터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던 컨벤션사업부장에게 물었다.

"제 컴퓨터 손댔어요?"

"어~ 블리야 팀장! 정리했어."

"정리요? 오늘 사장님과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는데요!"

"이러지 말지~? 응? 좋을 거 없잖아."


능구렁이 같은 눈빛과 말투에 나는 눈이 돌았다.


뭐? 좋을 거 없잖아?
무슨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내 컴퓨터엔 그간 해왔던 행사자료뿐만 아니라 처음 컨벤션 일을 시작할 때부터 그때까지 모아 온 수많은 기획서와 프레젠테이션자료, 결과보고서가 가득했다.


컨벤션사업부장이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가고 나 못지않게 충격을 받은 직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 회사가 어려워 인건비를 아낀다고 제대로 된 경력자 하나 뽑지 않았다. 그렇게 가르쳐가며 주임, 대리, 과장으로 키워 온 내 직원들. 그 아이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와중에 울음을 터트린 건 전시사업부 대리였다. 지난 몇 년간 회사 매출의 90% 이상을 하며 바빴던 컨벤션사업부와 달리 실적이 부진했던 전시사업부를 꼬박꼬박 행사에 투입해 역할을 줘왔다. 부서와 상관없이 우린 그렇게 다 같이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견뎌왔다.


사장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사에도 오지 않았다. 이사도 웬일인지 회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5년간 지켜왔던 회사를 그렇게 빈손으로 나왔다. 분한 마음이 밑바닥부터 차올랐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을 정하고 집에 내려갈 계획이었다. 그런 마지막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그 화를 가슴에 담고 도저히 아빠를 보러 갈 수가 없었다. 평소 전화를 잘 하지 않던 아빠가 전화를 하셨다.


"몇 시에 올래?"

"아빠.. 죄송해요. 모레 내려갈게요."

"그래 일이 바쁘지? 알았다. 조심히 다녀라. 그럼 목요일에 보자."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아빠는 내가 일이 바쁜 걸로 생각하셨다.


직원 한 명이 그날 12시가 다 되어 집으로 찾아왔다.

"팀장님. 저희도 회사에 할 말 많은데 참고 있어요. 팀장님을 이렇게 내보내는 건 정말 아니죠. 죄송해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요. 오늘 제가 다녀간 건 없었던 일이에요."


계절마다 운전할 때 들으라며 최신가요를 CD에 구워주던 직원이다. 모두들 퇴근하길 기다린 직원은 컨벤션사업부장이 외장하드에 옮겨놓은 내 컴퓨터 자료를 CD에 담아 마지막 선물로 가져다. 그간의 나의 진심, 열정, 시간이 손바닥만한 CD 한 장에 담겨 돌아왔다.


그리고 회사는 기다렸다는 듯 나의 퇴직금을 정산해 보냈다. 퇴직금을 받고 다시 한번 분노가 치솟았다. 안식년 휴가라고 두 달간 줬던 50%의 월급이 내 퇴직금 정산 기준금액이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처음부터 내가 타깃이었다고 사람들이 한 말이 믿어졌다.


올라오는 화를 눌러 내리고 경영기획실에 전화를 했다.

"대리. 대리가 한 일 아닌 거 알아. 여기까지 오니까 무서 없네. 사장에게 전해줘. 퇴직금 정산 제대로 안 해주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집에 내려갈 준비를 하고 겨우 눈을 붙인 목요일 새벽,

진단 두 달 만에 아빠는 황급히 먼 길을 떠나셨다.


아빠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빠의 장례식장에 화환이 도착했다. 회사에서 보내온 것이다. 직원들이 늦은 밤 전주로 내려왔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온 부족한 팀장이었지만 부고소식에 내려와 준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직원들이 가고 나자 사장이 이사와 함께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고맙지가 않았다.


장례 후 나는 엄마와 함께 지내며 아빠의 물건들을 정리했다. 사망진단서를 받아두었지만 동사무소에 가는 일을 미루고 싶었다. 사람이 그리우면 일찍 떠난다는데 그 이른 새벽 길을 떠난 아빠. 아빠를 기다리게 하고 마지막을 지키지 못한 나는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씻어낼 수 없는 불효와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니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신고를 마친 후 사망이라고 찍힌 아빠 이름을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49재를 치른 후 업계 동료로부터 전화가 왔다. 일을 하며 추스르라는 조언과 함께 행사를 부탁해 왔다. 살아있는 나는 살아가야 했다. 


서울로 올라와 프리랜서로 일을 다시 시작했다. 전처럼 열정이 끓어오르지가 않았다. 그때 나에게 가장 많은 위안을 줬던 친구가 있다. 첫 회사에서 행사를 같이 하며 만난 종합대행사 차장이다. 나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오빠라고 부르기엔 낯간지러워 박차장을 줄여 '박차'라고 불렀다. 부장 승진을 한 후에도 여전히 나에겐 박차였다. 첫 회사에서 같이 인턴을 했던 동갑내기와 함께 우리 셋은 자주 만나왔다.


아빠를 일찍 여읜 박차는 일련의 일을 겪고 아빠의 장례까지 치른 후 혼자 있는  걱정이 되었는지 내가 살고 있는 석촌호수 근처로 와 저녁을 사주고 가곤 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던 곳이 박차 회사와 가까워 퇴근 후 맥주를 한잔씩 하기도 했다. 셋이 모일 때 한 번씩 노래방에 가면 한시도 바닥에 발을 붙여두지 못하고 탬버린을 화려하게 휘두르며 싸이보다 더 신나게 챔피언을 불러줬다. 누구든 박차의 현란한 춤사위와 탬버린 솜씨를 보면 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그해에도 우리 셋은 연말 송년 모임을 했다. 그리고 송년 모임 다음날 박차에게 다리 통증이 찾아왔다. 탬버린을 너무 많이 휘둘러서일 거라며 며칠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다. 통증이 지속되자 디스크 검사를 받아보라는 주변의 조언에 정형외과를 찾은 박차는 큰 병원을 가보라는 의사의 소견을 받고 가톨릭 성모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다. 허리와 골반 사이에 혹이 있었다. 제거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에 수술대에 올랐지만 수술은 진행되지 않았다. 개복해 상태를 확인한 의사는 그대로 덮었고 박차는 원자력병원으로 옮겨졌다.


퇴원 후 집에서 투병을 이어가던 박차는 걸을 수 없게 되었고 어머님이 24시간 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간호했다. 소고기를 사다 줬을 때는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울면서 먹었다'며 고마워하고 천혜향을 사다 준 날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 있다니'하며 감격해했다. 골육종이었다. 생전 처음 들어본 그 무서운 이름은 4개월 만에 박차를 하늘로 데려갔다.


또다시 장례를 치렀다. 납골당에 잠든 박차를 남겨두 친구와 함께 석촌호수로 돌아와 식당에 갔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계속 주시는지 물을 수가 없었다. 친구, 아빠, 박차. 적어도 나는 살아있으니 견뎌야 했다. 신은 나를 강한 사람이라 여기고 이 세상에 보내셨나 보다.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신다 했으니 이만큼은 내가 견뎌내야 하는 일이겠지. 꾸역꾸역 참고 있는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떠난 어느 가여운 영혼서러워 우는 건지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식당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울어도 울어도 쌓여있던 울분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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