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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아빠 Aug 26. 2018

돌 + 3개월

어쨌든 의사소통의 시작

아이가 태어난지 75일 이후, 100일도 지나고 돌도 지나 시간이 훌쩍 흘러 어느덧 만 15개월을 바라보고 있다.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을텐데, 떠올리자니 벌써 뚜렷하지 않다. 부모님들이 '너희 키울때 기억 잘 안나' 하는 말씀들이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벌써 그렇다. 슬슬 뛰기 시작하는 아들을 보고 있으면 언제 누워있었나, 기어다녔나 싶다.


전반적으로 남성은 여성에 비해 공감능력, 소통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실상은 주변에 대한 내 무심함을 덮으려 일반화하는 편향된 생각에 가깝지만... 그러다보니, 와이프가 울기만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이것저것 요구사항을 이해하는 모습은 놀랍기만 했다. 난 그 상황에서도 이 작은 생명의 뻔한 몸짓과 단조로운 음성을 최대한 논리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근데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얘가 언제 뭘 먹었지?(빨리 회고해보기)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때쯤 이렇다던데, 얘도 이런가?(비교, 유추해보기), 전에 이렇게 하니까 안울던데 이번에도 이렇게 해보면?(귀납적 접근) 등등. 와이프의 감성에 내 지성(!)을 최대한 얹어보면 그래도 해결책이 나올 때가 있어서, 내 노력이 육아에 영 쓸모 없지는 않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시간들이 지나고, 만 12개월 돌잔치를 경계로, 아이는 말 그대로 폭.풍.성.장 하기 시작했다.

일어서서 주변 사물을 붙잡고 게걸음을 시작하니 두 세걸음 혼자 걷기 시작하고, 열 걸음을 직선으로 걷더니 곧 방향을 회전하였다. 방향 회전을 하고 나니, 동요가 나오면 '빙글빙글' 춤도 춘다.

엄마를 한참 하다가, 이제는 맘마, 음머(=이모), 아빠, 바~(=밥), 으즈쓰(=아저씨), 구움(=곰), 안나(=안아줘), 안야(=아니야)를 표현한다.

말을 시작한다는 건 리스닝은 훨씬 많이 했다는 뜻이다. 이리와, 기저귀 갖져와, 집에 가자, 밖에 나가자, 엄마한테 이거 갖다줘, 아빠 안아. 다 알아듣는게 신기하다.


서로를 향한 듣기/말하기가 시작되니, 이제 장난도 시작된다.

손 잡고 일으키는 척 하다가 침대에 다시 밀어눕히기(꺄르르 웃는다)

방으로 숨으면서 "아빠 찾아라~" 놀이하기 (계속 찾으러 걸어/뛰어온다. 아무리 숨어도 잘 끝나지 않는다)

(이건 주어가 바뀐 행동) 먹을 것을 건네 주다가 입을 벌리면 도로 거두고 자기 입에 넣는다 (이건 거의 나한테만 하는 짓)


아빠는 직접적인 소통이 시작되어야 더 많은 교감을 하는 것 같다. 여자들(이라 일반화했지만 실제로는 와이프)이 말 없는 남자의 의중을 곧잘 헤아리는 것과 반대로, 남자들(이 역시 사실은 나)은 여자가 흘리는(하지만 돌이켜보면 꽤 명료한) 단어를 잘 해석하지 못한다. 어찌보면 아이와의 소통은 내 어리석음 정도의 연장선에 있기도 하다. 그냥 더 많은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스스로의 다짐이다.




아이와 소통, 교감으로 즐거움이 늘어나도, 당연히 나를 향한 고민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아이가 가정의 중심으로 들어올수록, 나와 같은 맞벌이 부부에겐(외벌이라도 똑같겠지만) 앞으로의 직장생활, 또는 다른 계획 + 둘째 계획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생각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전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짤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주관식 서술형 문답에서 사지선다형 풀이로 바뀐 정도가 가장 적합한 비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답을 '5. 기타' 항목을 만들어서라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길 땐, 내가 서있는 맥락이 이제 많이 달라졌구나 체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조건에서 다양한 성장방식에 대한 경험들을 보고 있으면 많은 용기를 얻는다. 다른 고민과 현실이 많은 사람들을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대안으로 이끈다. 모든 처한 현실은 기회라고 믿는다.


난 현재 건축과 동떨어진 직업을 갖고 있지만, 내 전공인 건축수업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는 훌륭한 디자인의 출발점은 늘 제약조건이라는 점이다. 어떤 제약도 없는 도시 상황은 좋은 건축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지 앞의 좁은 도로, 해를 가리는 옆 건물의 높이, 경사진 땅 모양, 법적인 규제가 결국 건물의 고유한 형태와 독특한 기능을 결정한다. 제약을 기회로 디자인해내는 것이 건축가의 역할이고 소임이다.


대학을 졸업하던 몇 년 전 가장 핫하게 떠오른 건축그룹은 덴마크의 'B.I.G' 라는 이들인데, 이들의 모토는 'YES is more' 이다. 이 그룹은 모든 이해관계자(stakeholder)의 요구사항에 'YES'라고 자신있게 응답한다. 많은 요구사항 속에는 당연히 상반되는 내용이 있을 수 밖에 없을텐데, 그것을 디자인으로 정면돌파한다. 돌이켜보면, 이들의 두각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감히 연결지어본다.


오늘은 복직을 앞둔 와이프랑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아이가 기대한만큼 제때 잠이 들어준다는 전제 하에.


아무튼, 뜬금없는 나의 다짐으로 끝내는 8월 마지막 주말, 15개월 차 육아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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