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191.49km, 오늘: 17.42km, 걸음 수: 22,434
표지사진 | 서울 금천구 독산2동 ‘희망을 희망하는 길‘
형! 나 혼자 집에 갈게!
내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 말 한마디만큼은 영롱하게 기억한다. 국민학교 2학년인지, 3학년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사촌형(사실은 호적상 삼촌이지만)을 따라 강남구 ‘일원동’에서 금천구 ‘독산동’까지 갔다가, 혼자서 집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내가 어떻게 집에 돌아왔었지?’
궁금했다. 그동안 수십 년을 잊고 살았는데, 돌이켜보면 참 대단한 일이다. 80년대 초, 그 시절에 나는 지하철도 몰랐고 환승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니까.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 도대체 어떻게 오갔는지 기억이 한 개도 없다.
모처럼 연휴인데 날씨가 썩 좋지 않았다. 다행히 오전에는 비 소식이 없어 아침 일찍 나서기로 했다. 열심히만 걸으면 오후에 비가 내리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다녀올게!” 아내가 청소하느라 듣지 못했는지 대답이 없다. 아내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살며시 나왔다.
아침 기온이 차다. 봄은 겨울 엉덩이를 졸래졸래 따라다닌다. 일기예보 방송에서는 봄기운이 만연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쌀쌀했다. 얇은 패딩을 걸치고 가방은 따로 메지 않았다. 오늘은 희미한 기억의 도시, 독산으로 간다.
서울 금천구의 독산동은 서울의 최남단, 서남부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독산동의 독산(禿山)은 '헐벗은 산' 또는 '대머리 산'이라는 뜻이다. 산이 얼마나 메마르고 헐벗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지금은 첨단도시까지는 아니어도, 빽빽하게 들어선 주택들이 독산의 머리숱이 되어 주었다.
독산동은 허허벌판 구릉지에서 유래된 마을이다. 고려·조선시대엔 논밭이 펼쳐진 농촌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봉제·방직공장과 함께 산업지대로 급격히 변모했다. 일제강점기엔 군부대가 주둔했었고, 6·25 전쟁 중에는 미군 보급기지로도 쓰였다. 지금도 골목 곳곳엔 작은 제조업체들이 남아 있어 산업의 잔향을 느낄 수 있다. 최근에는 전신주 디자인 개선, LED 조명 설치 등 보행 환경을 바꾸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도시의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걷히는 동네, 독산동이다.
평소에는 독산동을 가 볼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거의 40년 만의 방문이다. 전혀 모르는 버스를 타고 독산동 아무 데서나 내렸다. 버스중앙차선 옆으로 ‘서울금천우체국’ 이 보인다. 저 앞으로는 홈플러스 매장이 보이지만,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마트 휴무일인가?’ 그러고 보니, 8차선 도로마저 휑하다.
어디로 갈까?
길을 건너, 낯선 골목 하나를 골라야 했다. 침을 탁— 뱉어 튄 방향으로 가볼까 했지만, 너무 올드했다. ‘그래, 어차피 다 모르는 곳인데. 어딘들 뭐가 중요하겠어.’ 결국, 발이 먼저 닿는 쪽으로 움직였다.
독산동은 1960년대에 경기도 시흥군에서 서울시로 편입된 동네다. 한때는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많이 살던 동네이기도 했고, 결국 산업 일꾼들이 모여 살며 한국을 일으켜 세운 노동자 마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노동현장의 부산스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들어선 골목 여기저기엔 오래된 먼지가 퇴적층처럼 쌓인 고된 삶의 흔적이 역력했다. 주택들은 밀집되어 있고, 전신주는 어지럽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동네이지만, 한산하면서도 밀도가 높았다. 담벼락에 붙어있는 이정표를 보니 ‘독산 4동길‘이라고 씌어 있다. 땅을 유심히 보며 천천히 걸었다. 나는 독산의 향기를 느끼고 싶었는데, 왠지 구로의 냄새가 났다.
조금 더 눈길을 벽 쪽에 두고 걸으니, 낡은 벽의 브랜드도 없는 시멘트가 ”그 친구는 누구냐? “며 삐친다. 구로는 동네도 아니라며, 팔짱을 낀 채 입술을 삐죽 내민다. 하긴, 동네가 맞붙어 있어도 문화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구로의 향기는 왠지 공장 돌아가는 소리가 나고, 독산의 향기는 산 기운에 더 가까워 보였다.
골목을 지그재그로 걸으며, 동네를 훔쳤다. 높지 않은 비탈길이다. 길고 낮게 깔린 독산의 언덕은 마냥 쉽진 않았다. 보폭을 줄이고, 팔은 뒷짐을 쥐며 쉬엄쉬엄 걷는다. 담장을 슬쩍 건드리고, 깨진 듯 낡은 창문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독하게 버텨온 독산의 세월이 눈 끝으로 만져졌다.
동네 한가운데에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 방문했다. 오래된 고독 나무는 사람이 왔다고 좋아라 한다. 설마 했지만, 잠시 쉬는 10분 내내 방문객은 나 혼자다. 독산의 독은 홀로 독(獨)인가?
조금 더 걸으니, ‘별빛남문시장’이 보인다. 그나마 사람들이 왔다 갔다 보이기 시작한다. 나에게 시장은, 낯선 동네에 오면 항상 들리는 3대 명소 중 하나다. 성당, 학교 그리고 재래시장. 동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흔적을 남기기에 가장 좋다.
시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대체로 휴일 재래시장의 오전은 인적이 드문 편이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과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일꾼들만이 장사 준비에 바쁘다. 몇몇의 동네 아주머니들은 이 물건 저 물건을 비교하느라 진지하다. 그 손끝마다 삶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재래시장도 마트와 다를 바 없다.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사고 싶고 먹고 싶다. 해물도 좋고 과일도 좋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니 뱃속이 난리다. 꽈배기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데 겨우 참았다. 오늘도 독산동의 유명 맛집을 찾아 식사도 하고 리뷰도 써야 하니까. 여기서 군것질을 하기가 그랬다.
배를 다독이며 시장을 빠져나왔다.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음식 앞에서 걷기 달인이 무너질 수는 없었다. '에효~ 뭔 소리래?' 비집고 나오는 원망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린다.
독산4동을 지나 독산3동의 ‘저 멀리~’ 고개 끝을 향해 계속 걸었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길에 몸 가쁜 노인이 털썩 남의 집 앞에 앉아 숨을 고른다. 그의 얼굴에서 내가 겪지 못한 독산의 세월을 본다. 나도 그 옆에 서서 벽에 기대었다. 저 앞에 오는 가족은 재잘재잘 행복하다.
시멘트 가루가 잔뜩 떨어질 듯, 오래된 집을 기웃거리다가 문득 전신주의 CCTV를 보고 움찔한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리액션을 크게 하면, 오히려 저 카메라가 나를 더욱 이상하게 보지 않겠어?‘
좁고 막다른 골목일수록 안심하라는 문구가 많이 보인다. ‘이런 거 써 놓으면 범죄 예방이 될까?’ 낯선이에게는 오히려 위화감을 주기도 한다. 차라리 모르고 걸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다.
비탈길 끝까지 오르자 아파트 단지가 펼쳐졌다. 아무래도 모든 동네의 재건축은 그 동네의 가장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공식인 듯했다.
동네 끝까지 올라오니 아주 큼지막한 공원이 나온다. ‘독산근린체육공원’, ‘만수천공원’, ‘독산자연공원’ 등 여러 공원을 한데 묶어, 거의 산 하나를 통째로 꾸며 놓았다. 체육공원 내 ‘독산 테니스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보기가 좋다.
공원 산길을 올라 몇 개의 계단을 지나니 이정표가 나온다. ‘호암사’는 너무 멀고, 조금만 더 가면 ‘서울정심초등학교’ 정문이 나온다고 씌여져 있다. 낮은 산이지만 오르기가 만만치 않다. 등산 차림도 아닌 데다 미끄러운 신발을 신고 끙끙대며 산을 탔다.
독산동의 반대편으로 신림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아래 비탈길로 내려가니 나무 사이로 지붕이 보인다. 뭐지? 낮게 깔린 집들이 자꾸만 눈길을 끈다. 내려가 봐야겠다.
조그만 마을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옛 기억을 끄집어 생의 한 번은 다녀와야겠다고 온 독산동이었는데, 이렇게 산 아래에 또 다른 마을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질 못했다.
집들은 대부분 가건물로 지어져 있었다. 골목은 겨우 한 두 사람이 지날 정도였고, 바닥돌은 비뚤거렸다. 인적도 없다 싶더니, 방금 어느 집에서 나온 노인은 힐끔 나를 쳐다보고는 곧바로 제 할 일을 한다. 내 키보다 낮은 지붕마다 비쩍 마른 덩굴이 부산스럽다. 집 한편에 놓인 빨간 고무 다라이를 몇십 년 만에 보았다.
어렸을 적, 검댕이가 여기저기 묻은 빨간 다라이 안에서 목욕도 하고 물장구를 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 좁은 다라이 안에서 동생과 둘이 자리 싸움하며 장난치고, 물이 밖으로 다 새어 나가면 다시 바가지로 물을 붓고 놀았던 기억 떠올랐다. 낯선 곳에서 만나는 익숙한 추억은, 쉽게 받을 수 없는 선물이다.
발을 멈출 듯 안 멈출 듯, 느리게 걸었다. 잠시 발을 멈추었다가 다시 걸었다. 나는 또 누군가에게 불편한 인상을 줄까 봐, 서둘러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 바퀴를 다 도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마을 입구에 간판이 보였다.
아카시아 마을?
그러고 보니 나는 얼떨결에 마을 뒷산을 타고 들어온 셈이었다. 아카시아 마을 이름이 너무나 좋았다. ‘얼마나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으면 마을 이름이 아카시아가 되었을까?’ 눈을 감으니, 향기로 가득해진다. 어느덧 초여름이 되어 온 마을은 아카시아 나무로 산들거린다.
40년 만에 다시 찾은 독산동은, 매우 낯설었다. 고모할머니 집도, 사촌형과 놀던 장소도 제대로 찾기가 어려웠다. 여긴가 싶은 놀이터는 공용 주차장이 되었고, 당시의 1층 단독 주택들은 어느새 다세대 주택으로 변해 있었다. 그 또한 세월이 흘러 많이 낡았다.
고모할아버지가 중동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 다녀오신 후 사 오신 전자시계가 문득 떠오른다. 녹색의 볼펜이었고, 뒤쪽에 달려있던 전자시계가 무척 신기했었다. 또 언제 가셔서 새 선물을 사 오지 않을까 기대했던 날들이었고, 멀리서 놀러 올 때마다 신났던 독산이었다.
시간이 더욱 흐른 뒤에는, 지금의 독산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자리에 들어설 새로운 건물들이 독산의 새로운 머리숱이 되어 '대머리 산'을 다시 멋지게 바꿔 놓길 바란다. 아주 희미한 기억의 도시 독산에서 나는 희망을 희망한다.
- 제15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