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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강북구 삼양동

누적: 209.75km, 오늘: 10.4km, 걸음 수: 13,739

by 마포걷달

표지사진 | 서울 강북구 삼양동 ‘골목길 끝, 희망으로’




삼양동? 난생처음 들어보는데?


내가 서울 안에서 아직 남아 있는 옛 마을의 자취를 찾아 걷는다고 하니, 회사 후배 김 차장이 '삼양동'을 추천했다. ‘삼양’이라고는 라면 이름밖에 몰랐었는데, 그런 동네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네. 지금은 아마 재개발이 끝나서,
달동네 모습은 많이 없어졌을 거예요.


김 차장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면 다녀와보시라며 권유한다. 그의 말에 호기심이 번득였다.


‘그래, 삼양동을 내 생애 언제 가보겠어?’

뜨거운 여름도 아닌데, 걸어서 달동네뿐이랴? 지금 같은 기세라면 달덩이 위에라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봄이 완연해 걷기에 좋은 날들이 찾아왔으니까.


봄은 내 발의 ‘부스터’다.




지도 앱을 켜고 삼양동을 살폈다. 정릉 뒤쪽으로, 국민대학교가 보이고… 서경대학교가 삼양동에 좀 더 가까이 있다. 그리고 지하철은 ‘우이신설선‘. ‘솔샘역’과 ‘삼양사거리역’이 삼양동을 둘러싸고 있다. 자주 타 볼 일이 없는 우이신설선 경전철을 타고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떨어지는 봄날, 나는 삼양동으로 갔다.


‘삼양사거리역’에서 내렸다. 지하철 역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았다. 몇 량 안 되는 아기자기한 기차답게 역사도 아기자기하다. 밖으로 나오니 화창한 봄기운이 그대로 머리 위에 앉았다.

‘둏구나!!’

느낌표 두 개다.


어디로 걸을까 두리번거렸다. 거리도 그렇고, 4차선 도로의 ‘삼양동사거리’도 조용했다. 길 건너 상가 건물은 오래전에 지어진 듯, 기다랗게 사거리를 에우고 있다. 그의 낡은 생(生)이 회색으로 뚝뚝 떨어지는데, 꽤나 정겨웠다.

서울 강북구 삼양로 ‘삼양동사거리’


희한하게도 길가에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은행나무나 플라타너스가 아닌 소나무라니? 근처 지하철 역 이름도 '솔샘역'인 것을 보니, 삼양동에는 소나무와 관련된 특별한 사연이 있는 듯했다.


삼양동 솔샘길 |
강북구 삼양동 솔샘역 인근 ‘솔샘길’은 도심 속에서 보기 드문 소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있는 거리다. 공해에 약해 일반적으로 가로수로 쓰이지 않는 소나무를 일부러 식재한 이 길은, 강북구가 지역의 역사성과 자연성을 살리기 위해 조성한 상징적 공간이다. 나무마다 관리번호와 담당자가 지정돼 있을 만큼 체계적으로 관리되며, ‘북한산 역사문화관광벨트’와 연계된 경관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로수 조성에 소나무는 매우 신선했다



마음속으로 고대했던, 오래되고 낡은 철거 직전의 집들은 보이지 않았다. 북한산 자락에서 이어지는 낮은 지붕들과 얽히고설킨 좁은 골목들. 문 열면 바로 앞이 길마당이라 손님을 마중하는데 찰나인 그 시절의 그 동네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여기도 나름 고지대라고… 언덕을 따라 단독채와 연립 주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늘을 쳐다보며 걸었다. 오르는 길이 바르지 않고 올팡질팡하다. 때로는 줄을 서지 못한 집들이 원래의 주인 행세를 못하고 이방인에 치어 한쪽으로 비켜나간 모습이다.


골목 한쪽으로 목욕탕 굴뚝이 보인다. 동네에서 대중목욕탕을 본 지도 꽤나 오랜만이지만, 멀쩡한 굴뚝도 새삼스럽다. 온천 유원지가 아니라면 언제 대중목욕탕을 갈 수나 있을까? 어린 시절 아부지와 목욕탕 다녀온 일도 아득하다. 아부지가 내 몸을 밀 때마다 때가 북북 나오는 게 창피해서 얼른 물로 헹구곤 했었는데. 그 모든 아련한 기억들이, 삼양동은 일상이다.


마을 전체가 조용했다.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애들도 없었다. 젊은이보단 어르신들을 가끔 마주친다. 골목을 따라 걷다가 커다란 담벼락을 마주한다. 만진다. 혼자 온 손님을 시원한 몸으로 맞이한다. 그를 따라가니 저 앞으로 북한산 자락이 휘리릭 펼쳐진다.



삼양동을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유튜브에서 삼양동을 미리 검색해 보았다. 찾아보니 2018년도 즈음 공중파에서 방영한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에 삼양동이 나온 적이 있었다. 겨울쯤이었나? 김영철 배우가 어슬렁거리며 천천히 삼양동 언덕 집들을 오르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마을 입구에서 동네 어르신들과 윷놀이하던 장면도 있었는데, '이따가 그곳도 찾아가 봐야지' 하는 마음이다. 사실 어디가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상에서 본 삼양동의 첫 느낌은 푸근함, 욕심 없음, 인상 좋음... 대단하진 않아도 소박하게 삶을 마주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낮은 지붕이 눈에 닿는 곳. 좁은 골목으로 다채롭지만 단아한 공기가 몸에 부대낀다. 조금은 높아도 오르고 싶은 계단의 끝에 서니, 오랜 세월 삼양동을 지켜 온 집들이 하늘을 배경으로 풍경이 되었다. 골목을 따라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느림의 미학이다. 천천히 흐르는 하늘강이 너무나 아름답다. 눈에서 떠나질 않는다.



골목을 나와 언덕길을 오르니 그 끝은 북한산 자락 ‘빨래골’로 이어졌다. 산을 타고 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벚꽃 잎이 흐드러지게 피다 떨어진 땅길을 밟고, 숲공기를 잠시 마시고 돌아서 나왔다. 삼양동 끝에서 이제 다 사라졌다 생각한 옛 마을의 자취를 만났다. 듬성듬성 보이는 숲 사이로, 다 스러져 가는 집 지붕 아래 몇몇의 주민들이 보인다. 그 앞으로 걸어가려니 수많은 나무들이 길을 막아선다. 어쩔 수 없이 멀리서 바라만 보는데, 그 옛날 삼양동 주민들이 말한 ‘미향마을’이 여긴가 싶었다.


삼양동 ‘미향마을‘ —
‘미향마을’은 강북구 삼양동 북한산 자락에 형성됐던 산동네로, 1950~60년대 무렵 무허가 주택들이 다닥다닥 모여 만들어졌다. ‘미향’이라는 이름은 꽃처럼 살고 싶다는 주민들의 바람에서 비롯된 비공식 명칭이다. 상하수도도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주민들 간의 정과 공동체 문화가 깊게 뿌리내렸던 곳이다. 2008년 도시 재개발로 마을은 철거됐고, 현재는 자연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미향마을은 여전히 삼양동의 삶과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름이다.



다시 산길을 내려와 ‘미향초등학교’ 뒷길로 빠졌다. 오히려 삼양동을 한 바퀴 돌아, 삼양동의 중심지로 들어온 셈이 되었다. 걷기 좋은 봄이라지만, 산길을 올라갔다 내려오니 땀이 흠뻑이 된다.


천천히 내려가는 길에 음악을 켠다. 요즘 즐겨 듣는 인디밴드 '나이트오프'의 '잠'이 흘러나온다. 음악의 물결을 따라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낮게 파도를 친다. 수많은 집들의 지붕과 그를 둘러싼 철조망들,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인연들이 만나 한가로이 명상을 나눈다. 한때는 매일같이 주인을 실어 날랐던 오토바이마저 "사직서"를 내고 남은 인생을 응달에서 편히 잠들어 있다. 봄바람이 슬슬 지날 때마다 삼양동의 느린 시간은 더뎌지고, 멈춘 시간 속에서 나 혼자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묘하다.




후배가 말한 오래된 마을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오래되고 익숙한 포근함을 만나고 돌아간다. 서로 이기려 욕심내지도 않고, 빠른 시간을 비웃듯 모든 시계가 멈춰진 삼양동은 늘어지게 평안한 ‘봄’ 같다.


마을 입구로 돌아오니, 여긴가 싶은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윷놀이판 집이 보인다. 아니다,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인상 좋은 주민들이 자기 할 일에 바쁘고, 아주머니 한 분이 웃으며 봄꽃을 어루만지는 모습에 슬핏 미소를 짓는다.


삼양시장이라는 푯말이 무색하게도, 시장과 마을은 서로 경계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 길 끝에서 나는 다시 미아동을 지나 집으로 돌아간다. 마을 초입에 잠들어 있는 노인마저도 마지막 삼양동의 인상을 더욱 감성적으로 만들어 놓았다. 나는 삼양동을 처음 왔지만, 오래 살아온 고향집마냥 좋았다.


- 제1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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