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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노원구 중계동 2/2

누적: 228.48km, 오늘: 18.73km, 걸음 수: 19,636

by 마포걷달

표지사진 | 서울 노원구 중계4동 ‘당현천, 물 길에서‘




저곳은 텁텁하지만 정겹고,
이곳은 정갈하지만 적막해.


지난 2년 동안 서울 동네를 이곳저곳, 정말 많이도 걸었다. 늘 감동하지만, 같은 서울이라도 동네마다 그의 문화와 감상은 서로 제각각이다. 빌라나 아파트, 물리적으로 모양은 비슷해도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주로 사는지’ 또는 ‘어떤 인프라가 많이 놓여 있는지’에 따라 동네를 걷는 느낌은 묘하게도 갈리었다.

백사의 길은, 오밀조밀 다르기도 하지. 이야기가 샘 솟기도 하지.


백사마을을 나와 마을 사이드에 붙어 있는 ‘불암산 더불어 숲’을 가로질러 하계동 방향으로 넘어갔다. 정비된 공원 숲길이, 백사마을 땅길과는 확연히 달랐다. 백사마을길은 ‘말라서 텁텁하지만 그 시멘트 부스럼마다 70년을 묵혀 온 사람 냄새‘가 가득했고, 그래서 그 발자국을 따라 걸을 때마다 그들의 일상을 엿듣는 듯했다. 하지만 바로 옆 더불어 숲 공원 길은 ‘정비된 나무 데크 위로 내리쬐는 태양에 습기를 다 빼앗기고, 생명은 이미 다했지만 그 사실조차 관심 없어하는 사람들의 발무게를 온전히 담아내어 묵직하고 적막한 ‘ 그런 느낌이다.


숲 길을 지나면서도, 산책하는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어느 한쪽 길은 정비를 하느라 출입을 금지했지만, 또 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산들하니 걷기에 좋았다. 저쪽에서 걸어와 이쪽의 끝까지 걸어 나오니, ‘충숙공 이상길 묘역‘이 나온다.


서울 중계동 언덕배기, 아파트 숲 사이로 조용히 자리한 ‘벽진이씨 충숙공 묘역’은 고려 충숙왕 시절의 재상 이곡(李穀)을 비롯한 이씨 가문의 선영이다. 중랑천과 백사마을 사이, 천 년의 세월이 스며든 이 언덕엔 국가 보물급 문인과 학자의 흔적이 고요히 묻혀 있다. 조선 전기부터 근세까지 대대로 이어진 묘역은 문화재청 지정 사적 제364호로, 묘제(墓制)와 봉분, 석물 등이 보존 상태로 남아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장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일대는 도시개발로 격자형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이 오래된 묘역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고요한 시간의 밀도를 증언한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 위로, 오래된 이름 하나가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
왼쪽 백사마을은 철거벽으로 막혔다. 오른편 ‘중계로 지하차도’ 윗길로 해서 하계동 방면으로 넘어갔다
충무공 이상길 묘역 앞



큰 대로변(한글비석로)을 따라 중계동으로 걸어 내려갔다. 몇 걸음 못 가서 ‘서울시립과학관’이 나오길래, ‘내가 여기를 다시 언제 오겠어?’하며 들렀다. 부부가 꼬맹이 손을 붙잡고 오는 곳, 젊은 학부모 여럿이 제각각 먹을 것을 싸 들고 와 담소를 나누는 곳. 옛 생각들이 아련하게 겹쳐든다. 우리 딸아이도 어렸을 때 이런 곳을 좋아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나는 그리 좋은 아빠는 못되었다. 더 많은 경험을 쌓게 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남의 가족들을 보면서 나의 부족했던 과거를 채우고 나왔다.


서울시립과학관은 노원구 중계동에 위치한 서울시 최초의 시립 과학관으로, 2017년 5월 개관했다. ‘생활 속 과학’을 주제로, 일상에서 접하는 자연 현상과 기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공간이다. 내부에는 로봇, 환경, 에너지, 도시생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전시실이 있으며,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체험이 가능하다. 야외에는 태양광과 풍력 등 에너지를 활용한 과학 놀이터도 마련되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과학 강연, 특별전시, 주말 체험교실 등도 정기적으로 운영된다. 서울여대와 서울과기대, 불암산 탐방로 인근에 위치해 있어 자연과 교육이 공존하는 장소로, 걷기 중 들러보기 좋은 문화 공간이다.



다시 중계본동으로 내려와 불암산 자락 아래 중계4동으로 걸었다. 중계동은 아파트 단지가 아니면 대부분 상가 건물이다. 그리고 역시 모든 층마다 학원으로 가득했다. 90년대부터 형성된 학원가는 강남의 대치동 못지않았고, 내가 살고 있는 마포 대흥동도 학원가로 유명하다지만 이곳에 비하면 그저 ‘새발의 피’다.


오래된 회색 상가 건물을 끼고 조근조근 걸었다. 학원 건물마다 빠질 수 없는 것, ‘분식집’. 그리고 ‘햄버거집’. 지금 아이들은 학원 끝나고 분식 먹을 시간은 있을까? 학원 가기 전, 재잘재잘 친구들과 놀 시간은 있을까 싶다. 딸아이 일과를 보면 정말 숨이 턱 막힌다. 숙제는 얼마나 많은지… 다니는 학원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보니 그만큼 숙제는 비율대로 늘어나고, 결국 숙제하다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으나, 이제는 이해가 가는. 요즘 아이들은 우리 학창 시절보다 훨씬 더 팍팍하고 안쓰럽다.


주일이라 그런지, 그나마 중계동 학원가는 평온하다. 문을 연 분식집도 한가하고, 책가방 메고 학원가는 애들은 손에 꼽는다. 중계동 은행사거리 대로변이 학원 끝나는 시간이면 아이들 실어 나르는 차들로 꽉 막힌다고 하던데, 오늘은 전부 올스톱이다.

어쩜… 저 큰 건물이 전부 학원으로 가득하다네.



단지를 돌아 불암산 자락으로 걷다 보면, 그 끝으로 ‘불암산 나비정원’을 가는 둘레길이 나온다. 요양원인가 싶은 힐링타운이 보이고, 그것은 자연스레 산길로 이어져 있었다. 나비정원뿐만 아니라 철쭉공원, 불암산전망대 등, 그 주변으로 여럿 공원들이 붙어 있다 보니 사람들이 정말 많이 보였다. ‘역시 봄기운은 좋은 거야. 중계동 주민들이 죄다 나왔구나!‘


약간은 적막했던 아파트 단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드넓은 동산에 꽃나무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다. 봄꽃은 이미 다 지고 사라졌는지, 파란 잎들이 너도나도 푸릇푸릇하다. 산책길 위로 하늘을 수 높은 알록달록한 우산꽃이 봄 꽃을 대신했을까? 온 김에 불암산을 좀 더 올라가 봐야겠다.


산책길을 내려가는 대신, 그리 높지 않은 비탈길로 오르니 ‘불암산 피크닉장’도 나온다. 여러 가족들이 둘러앉아 한쪽은 불암산을 보고, 한쪽은 책이나 상대방의 눈을 본다. 입가에 웃음이 가득가득. 정말, 누가 봄이 아니랄까 봐 내 맘 속에도 부러움이 차듯 그들 모두 꽃이다.


불암산 전망대를 오르는데, ‘여기도 산인가?’ 싶을 정도로 오르막은 쉬이 낮았다. 흙길이 끊어지고 돌 바위가 바다로 보인다. 낮은 산자락을 돌자락으로 바꾸어 놓더니, 자꾸 올라와 보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아무나 오르지 말라는 주의 표지판과 철책이 앞길을 막았다. 종종 사고가 났었는 듯, 아쉽지만 여기서 발길을 접었다.




중계동은 평화롭다. 백사의 삶마저 이제는 희미한 옛이야기로 접혀들며, 그의 지친 삶은 전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학생들의 열정과 가족의 응원은 아파트 단지가 아닌 넓은 들판에서 형형색색의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중계동은 불암산 자락과 그 주위로 넓게 뻗은 정원 같은 산책길이 있어, 다채로운 서울 동네의 맛을 선사한다. 백사의 길과 학원 길, 그리고 이곳 불암산 벌판의 드넓은 풍경은, 분명 어디에도 쉽게는 접하기 힘든 중계동의 매력일 것이다.


바람이 좋은 날에 연두로 빚은 중계동을 보았으니, 나는 나중에 다시 찾아와 눈꽃으로 덮인 중계동을 보고 싶다. 그것은 비록 수많은 아파트 단지로 가득하겠지만, 그 뒤로 펼쳐지는 불암산과 눈 덮인 벌판은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다. 돌아가는 길마저 상상으로 이미 나는, 중계동의 겨울 벌판을 걷고 있다.


- 제1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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