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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마포구 연남동

누적: 174.07km, 오늘: 7.01km, 걸음 수: 9,154

by 마포걷달

표지사진 | 서울 마포구 연남동 ‘동교로 30길’




시간 날 때,
연남동에서 원두커피 좀 사다 줘요!


아내가 사무실에서 마실 커피가 떨어졌다며, 원두커피를 사다 달라고 한다. 예전에 내가 맛보라고 건네준 커피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 보다. 방배동 바리스타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연남동의 '샌드스톤커피랩'이라는 커피 전문점의 '검은 모래' 블렌딩이 특히 좋다. 이렇게 열심히 홍보를 하는데, 그 가게 사장님은 이 사실을 알까? ^^



그래, 알았어.
오랜만에 연남동을 걸어야겠네?


“아이쿠~ 됐다!”며, 아내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데 또 기어 나가냐고 핀잔을 준다. 기어 나가는 게 아니라 걸어 나간다고, 말 나온 김에 시간 나서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2월의 바람은 차갑지만 산뜻하다. 이제 정말 봄이 머지않은 날이다.

좋은 바리스타의 커피는 진리. - 샌드스톤커피랩, ‘검은모래’




경의선 숲길을 통해 연남동으로 향했다. 연남동은 '연희동의 남쪽 동네‘라는 뜻이다. 이 지명은 1975년에 처음 생겼는데, 서대문구 연희동의 일부가 마포구로 편입되면서 연희동의 남쪽 지역을 '연남동'이라 부르게 되었단다.


마포구에서 연남동은 홍대입구나 합정보다 더 핫하다. 이 동네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 소공동과 태평로 일대의 ‘화교촌‘이 재개발되면서부터이다. 이때 상당의 화교들이 연남동으로 이주해 오면서 자연스럽게 중식당들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도 골목마다 오래되고 유명한 중국집이 하나씩은 자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화교촌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중국 상인들의 정착으로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인천을 중심으로 상권이 확장되었으며, 서울에서는 명동과 소공동 일대에 집중되었다.

1969년 한성화교중고가 연희동으로 이전하면서 문화의 중심도 함께 이동했고, 화교들은 자녀 교육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한때 외국인 토지 소유 제한 등의 법적 제약이 있었으나, 1999년 외국인 학교로 인가를 받게 되면서부터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현재 연남·연희동 일대에는 화교협회, 학교, 전통 중국집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연남동을 알기 시작한 근래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런 맛집들이 입소문을 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후 홍대 상권이 확장되며 연남동은 더욱 발전했고, 홍대의 높아진 임대료를 피해 예술가와 창업가들이 연남동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특히, 2011년 경의선이 지하화 되고 2015년 숲길 공원이 완공되면서, 연남동은 이제 ‘잘 모르는 동네’에서 ‘누구나 아는 동네’가 되었다.

연남동의 시작, ‘경의선 숲길’



대흥동 집에서 '경의선 숲길'은 지척이다. 5분만 나가면 공원길이라 운동하기에 너무 좋다. 경의선 숲길은 다채롭다. 흙길도 있고 돌길도 있으며, 때로는 수풀길도 있다.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일부러 발을 옮겨 다니면 모든 숲길이 품고 있는 그의 넋두리를 들을 수 있다.


경의선 숲길은 회색이다. 나무들은 저마다 '풍성한 숲의 꿈'을 품고 겨울을 나고 있다. 나뭇가지 끝은 하늘을 쓸어 담는 싸리비,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쓸어낸 하늘을 보며 칭찬 한마디를 건넨다.


놀지 않고 열심히 잘 쓸었네?

녀석도 듣기에 좋은지 작은 바람에도 덩실덩실 엉덩이 춤을 춘다.

추운 겨울에도 연인들은 언제나 ‘봄’


대흥동 집으로 이사를 온 지, 만 10년이 넘었다. 그동안에 수백 번은 걸었을 텐데, 이 길은 지겹지가 않다. 사시사철 피는 꽃과 나무는 언제나 같은 녀석들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얼굴이 바뀌었네?” 하면, 겸언쩍듯이 빼꼼 웃기만 한다. 내가 그들을 좋아해 주니 그들은 내게 향기를 준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나를 사랑한다.


길가의 풀들도 반갑다고 내 종아리를 쓰다듬는다. 숲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일부러 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걷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사르락 거리며 스치는 그 따스한 보듬이 좋다.


돌길과 흙길을 번갈아 밟으며 걷는다. 오늘은 겨울바람에 흙길이 더욱 단단해졌다. 평소 걸을 때마다 발길에 기지개 켜던 먼지도 잠잠하다. 겨울바람이 물도 없이 고요한 강물 같다.


경의선 숲길(Since 2015)
경의선 숲길은 과거 기차가 달리던 ‘경의선’ 지상 철도를 철거한 뒤 조성한 선형 공원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앞역’에서 마포구 ‘가좌역’ 인근까지 약 6.3km 구간으로, 2015년부터 단계적으로 개방되어 2016년 완전히 개방되었다.

특히 연남동 구간은 ‘연트럴파크’라 불리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책 명소로 자리 잡았다. 카페, 서점, 공방, 벽화가 철길 옆에 늘어서 있고, 주말이면 거리 공연과 플리마켓이 열려 걷는 이들의 발걸음으로 붙든다.

기차는 사라졌지만, 철길은 그대로 남아 사람과 기억, 골목의 시간이 흐르는 길이 되었다. 도심 속 여백 같은 이 길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걷기의 장소다.



'경의선 숲길' 중간에 도달하면, 연남동이 시작된다. 그곳에는 애경그룹에서 운영하는 'AK플라자'가 있다. 홍대입구역 4번 출구와 연결된 이곳은, 2018년에 개장한 종합 쇼핑·문화 공간이다. MZ 젊은이들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맛집, 문화 공간,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AK플라자는 숲길을 걷는 이들에게, 비나 눈이 올 때면 잠시 피할 수 있는 든든한 지붕 역할을 한다. 지붕 아래 한켠에 자전거들이 잔뜩 놓여 있다. 그것은 우리 동네 아파트 자전거를 닮았다. 녹슬고 낡은 모습을 보니 주인을 잃은 반려견 같다. ‘누가 놓고 간 걸까?’

오랫동안 방치된 자전거는 결국 철거가 되고 만다


연남동 초입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넓게 열린 입구는 누구나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좋은 공간이다. 봄•가을 이곳에서는 다양한 문화 축제가 열리곤 하는데,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나까지 즐거워진다. 그 사람도 좋고, 그 사람을 보는 나도 좋다.


이곳은 성수동과 문래동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성수동이 트렌디하고 인더스터리얼하며 플래그십 스토어가 가득한 아기자기한 느낌이라면, 연남동은 힙하고 감성 있다. 문래동이 조용하고 실험적이며 예술가의 영혼이 깃든 블루스 같은 곳이라면, 연남동은 팝아트와 시티팝이 손 잡고 함께 걷는 역동적인 동네 같다.


연남동은 낡은 주택들이 좁은 골목으로 이어져, 걷는 길마다 색다른 매력을 담고 있다. 미로 같은 골목마다 다양한 음식점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퓨전 요리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연남동만의 특별한 맛을 선보인다.


'이런 음식도 있구나' 하며 신기한 것들을 눈에 담고 걷다 보면, 낯선 음식들에 절로 경외감이 든다. 내게는 짬뽕이지만 그들에게는 ‘부야베스’ 한 그릇. 내게는 피자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 그것은 ‘플렛브레드’.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팔짱을 끼고 걷고, 나는 혼자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이렇게 대조되는 모습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이 슬플 새도 없이 감성 뿅뿅 묻어나는 골목에 멍 빠진 채 걸었다.




연남동의 핫플레이스를 지나, 조금 더 떨어진 모래내 방면과 동교동 방향으로 걸었다. 이곳은 홍대입구역 근처보다 복잡하지 않고 조용하다. 집들은 옛집과 신축 건물이 조화를 이루어 다채롭다. 걷다가 마주친 한 채의 빨간 벽돌집은, 내 눈을 몽땅 자기 모습으로 담는다. 낡았지만 선명하고 몇 줄 안 남은 내 머리 기억의 공간에 자기 이름을 새긴다.


길을 걷다 보면 여기저기 동남아시아 음식점들이 눈에 띈다. 특히 '툭툭' 오토바이가 세워진 골목은 마치 태국이나 베트남에 와 있는 듯, 정취가 물씬 풍긴다. 짧은 거리에도 강렬한 인상을 주니 한참을 본다. 문틈으로 슬핏 보이는 직원들은 나에게 좋은 기운으로 다가온다.


이곳 음식들은 하나같이 다 맛있다. 가격도 좋고 현지의 음식 맛을 그대로 살린 점이 매력이다. 걷다가 마주하는 이국적인 음식과 식당들은 걷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자, 지나치기 아쉬운 느림의 미학이다.



모래내 경계의 끝까지 갔다가 대나무 가득한 막다른 골목을 만난다. 몇 번을 와봤지만, 오랫동안 가장 외진 곳에서 가장 외로웠던 이곳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조용한 곳 중에서 가장 조용하다. 누가 틀어 놓지 않았어도 재즈가 들린다. 선율을 따라 여기 보고, 저기 걷다 보면 다시 그 끝에서 동교동을 만난다.


동교동 경계를 따라 걷다 보면, 여기저기 옛 ‘화교촌’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하얗게 칠해진 낡은 건물에서 중국요리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콧속으로 들어가 미각을 자극한다. 크기는 작은데도 대기줄은 저만치다. 큰길과 조금 작은 길, 다시 골목을 지나 걷다 보니 ‘곰’ 여러 마리가 식당 의자에 앉아 영업 중이다.


녀석들은 지나가는 연인들도 꼬시고, 아무짝에 쓸모없는 나마저도 붙든다. 그의 의자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으로 머리를 퉁~ 튕겼다. 그저 가만히 웃고만 있는 녀석이 '겨울에 얼었나?' 싶어, 입김을 후~ 하고 내뱉었다. 그래도 웃고만 있는 녀석을 보니, 내가 잠깐 동안 행복하다.



연남동 끝을 찍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벌걸음이 가볍다. 집에서 여기 연남동까지, 전체 길이는 7km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사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다 만나고 온 듯하다.


푸른 창공 아래에 작은 씨앗을 뿌렸더니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는 다시 바람에 흩날려 여기저기 자기의 색깔을 퍼뜨린다. 그렇게 가벼운 행복이 가득한 곳, 나는 연남동이 참 좋다.


- 제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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