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167.06km, 오늘: 22.5km, 걸음 수: 27,573
표지사진 | 서울 동작구 본동 ‘노들나루공원’
뭐랭? 아빠! 난 자격이 안된다구용~
이제 막 고등학교를 올라가는 딸아이가 무심하게 말을 퉁~ 친다. 아빠가 원하는 ‘노래하는 검사’는 자기가 관심도 없을뿐더러, 자격은 눈곱만큼도 안된다는 말투다.
아니~ 뭐, 해보지도 않고 벌써 자격
운운하냐?
나는 꼭 우리 아이가 검사가 되면서, 노래도 잘하는 가수가 되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저 노래는 잘하지만 본업은 가수가 아니길 바랐고, 이왕이면 검사쯤 되면 유니크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빠, 그만~~~~~~
애는 더 이상 듣고 싶지도, 관심도 없다는 듯 입을 틀어막는다.
“ㅋㅋ 알았어. 뭐, 검사는 아무나 되나? 게다가, 너는 노래는 잘하는데… 바이브레이션은 안 되더라.“
아이 가슴에 화살을 퉁~ 박고선, 나도 더 이상의 의미 없는 농담은 접기로 했다. 뾰로통, 애는 후다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사실 노래하는 검사는 아니고, 노래하는 변호사는 있었다. 1998년에 데뷔한 이소은이라는 가수는, 공부도 썩 잘했고 노래도 참 잘 불렀다. 그의 대표곡은 ‘서방님’이었는데, 나는 그 노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어머~ 변호사인데, 노래도 잘하네?’ 하는 놀라움만이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이후 나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변호사인 가수도 있으니, ‘그래! 너는 노래하는 검사가 되자’라며 태어난 지 두 달도 안된 아이한테 줄곧 세뇌를 했었다. 물론, 완벽히 실패했지만!
이소은(1982년)
이소은은 1998년 고등학생 시절 ‘서방님’으로 데뷔한 감성 발라드 가수다. 청아한 음색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주목받았고, ‘기적’, ‘오래오래’, ‘닮았잖아’ 같은 곡들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 변호사 자격을 얻었으며, 로펌에서 국제 중재 변호사로 일했다. 현재는 음악과 법을 잇는 활동을 이어가며, 예술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길을 걷고 있다.
뭐, 꼭 그 일 때문으로 미련이 남아 ‘노량진’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저 녀석이 정말 법을 공부하겠다고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가면 어쩌지? 하는, 그런 생각은 농담처럼 흘려야 할 일이고. 이제는 판검사가 사시패스로 가는 시절은 아니니, 예전처럼 노량진 고시원에 갈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것보다는 노량진이 마포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솔직히 그동안 노량진 하면 수산시장밖에 가본 적이 없었으니, 언젠가는 노량진동을 제대로 한 번은 밟아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애가 고시원에 갈 것도 아닌데. 내가 일부러가 아니면 언제 노량진동을 걸어보겠어?’ 하면서, 이번 주말엔 꼭 거기를 가 볼 거라고 마음을 먹었다.
새 봄이 오려면 아직도 한 두 달이 남은 계절이다. 애매하지만 일단 복장부터 두둑이 챙기고 길을 나섰다. 아침해는 안개에 가려 살짝 웃었다 숨었다 한다. 그래도 그 얇은 옷으로 다 가릴 수는 없는지, 세상은 온통 회색으로 밝다. 한강변을 따라 마포대교에서 한강대교로 걸었다.
강무(江霧)라고 해야 하나? 저 멀리 황금빛 63 빌딩마저도 안개 커튼을 쳤다. 물기를 담은 공기에 상쾌한 발걸음이다. 높은 싸리나무와 겨울 갈대가 한들거린다. 이른 아침이라 혼자 걷는 강변은 온통 나에게만 땅기운을 준다. 독점이라 행복이네?
한강대교를 통해 상도동과 노량진동으로 넘어간다. 노들섬은 오랜만에 왔다고 웃음이 함박이다. 무언가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지난여름에 네가 흘린 땀자국’이라며 보여준다. 매번 흔적을 지우지 않고 남겨주는 일은, 나에 대한 관심이자 예의일 것이다. 노들섬, 그에게 꾸벅 감사를 표하고 마저 남은 다리를 건너갔다.
바로 노량진동으로 건너기 전에, 나는 오래전부터 이름만 들어봤을 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육신공원’으로 향했다. 사육신은 알 듯 말 듯, 머릿속 한쪽 어딘가 티끌의 티끌, 그 티끌의 십만 분의 일쯤에 걸려 있는 명칭이다. 역시, 눈앞에 있는 30년 만에 만난 동창 이름조차 기억 못 하는 나에게, 사육신을 떠올리는 건 애초에 무리였다. 신하였나? 네 명? 아니면 여섯 명? 누구였더라? 아… 무리다, 무리.
그렇게 어리둥절한 채로 공원으로 향했다. 보통 노량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편으로 사육신공원 푯말이 보이는데, 나는 후문으로 연결 진 래미안 아파트를 통해 들어갔다. 애초에 이 아파트는 지을 때부터 주민들이 공원으로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한 것 같다.
공원 자체가 50년이 다 되어가는지라, 구석진 주변으로는 낡은 계단이 덧씌운 시멘트로 범벅이다. 그 돌을 밟고 올라서니 저 너머의 한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근사하다‘ 짧은 외마디 탄성이 흘러나왔다. 풀숲이 시야를 가렸지만, 풍경을 다 감출 수는 없었다. 그 옆으로는 군사시설이 있었나 보다. 출입을 막던 표지판은 세월의 풍파를 맞고 화석이 되었다.
공원 한 바퀴를 다 도는데 20분도 채 안 걸렸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 있다. 입구에 놓여있는 방문록에 짧은 기록을 남겼다. 기도를 하고 짧은 생각에 잠겼다. 이들은 충신이었나, 아니면 역신(逆臣)이었나? 결국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다. 어찌 되었든 내가 여기 살아 있으니 모든 것은 그들의 유산이다.
기도를 하는데 새 한 마리가 소곤댄다. 그래도 여까지 와서 기도하는 내가 좋았나 보다. 문을 나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저귄다.
길을 건너 노량진동으로 건너는데, 한없이 낡은 건물들이 마중 나와 있다. ‘다 철거 중인 거야?’ 노량진로 대로변에 서 있는 많은 건물들이 ‘철거’라고 락카칠이 되어 있다. 재개발을 준비하는 듯, 빈 건물과 비어갈 건물들이 줄을 지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아직 이전을 못한 식당이 운영을 한다.
잠시 머뭇거렸다. 어디로 갈지 고민을 하다, 우선 ’노들역‘을 지나 ’상도터널‘로 향했다. 바로 노량진동으로 들어가기 전, 한 번쯤은 저 상도터널 위로 올라가 보고 싶었다. 길을 건너니 ’본동‘이 나온다. 전혀 몰랐던 동네다.
본동(本洞)은 서울 동작구 한가운데에 자리한 작은 동네다. 상도터널을 사이에 두고 노량진과 마주하며, 동쪽으론 흑석동, 서쪽으론 상도동과 맞닿아 있다. ‘본(本)’이라는 이름은 과거 이곳이 동작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엔 한강을 따라 물자와 사람이 오가던 교통 요충지였고, 지금은 낡은 주택과 골목, 작은 시장이 어우러진 서울의 오랜 꿈결이 남아 있는 동네다.
오밀조밀한 골목을 담고 몇 분정도만 오르면 정상에 닿는다. 맨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강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좋구나. 새삼 감탄을 한다. 누군가는 힘들어 죽겠는데, 나는 겨우 여기 한 번을 와 보고 세상 구경한다고 좋덴다. 남이 볼까 봐 금세 감탄을 거두었다.
옛집과 헌 집이 뒤섞여, 여기도 서울 한복판이라고 속닥댄다. 마지막 달동네를 이루고 있는 듯, 이곳저곳 삶의 자욱이 가득하다. 누군가 떠난 집은 남겨진 쓰레기로 기억을 지우고, 남은 자들은 여전히 흔적을 쌓고 있었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동네 이름을 딴 ’본동초등학교‘가 보인다. 1980년 대, 코를 질질 흘리던 동네 꼬마 녀석들이 상상이 간다. 눈을 감고 있으니 바람이 한강냄새를 담고 얼굴을 스친다. 내가 자란 곳도 아닌 것이, 괜스레 내 고향 같다.
본동 꼭대기에서 상도터널 위를 건너니, 흑석동으로 이어진다. 이웃한 동네마다 자기 색을 놓치기 싫은 듯, 선 하나 차이로 지역의 공기와 결이 달라진다.
하늘로 뻗은 기다란 계단 하나가 나온다. 이정표엔, ‘노량진근린공원’이라 씌어 있다. 흑석동 근처를 지나 또다시 노량진동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지체 없이 딸아이가 꿈꾸지 않았던 동네로 발을 옮긴다.
- 제1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