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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종로구 창신동

누적: 106.46km, 오늘: 15.62km, 걸음 수: 22,029

by 마포걷달

표지사진 | 서울 종로구 창신3동 ‘겨울, 날다’



뭐 하러 마트에서 사?
애들 장난감은 창신동에 가서 사면 돼?


우리 애가 한창 어릴 때니, 벌써 10년도 넘었나 보다. 아내는, 내게 생전 듣보잡이었던 ’창신동‘엘 가서 딸아이 장난감을 사잰다.


거기가 장난감이 싸다구.
한두 번 놀고 또 쉽게 질려서 버릴 텐데, 비싸게 살 필요 없잖아요.


창신동이 유명한 ‘완구 거리’라고 해서, 각종 장난감을 아주 싸게 파나 보다. ‘그런 데가 있었어?’ 하면서 아내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다녀온 창신동 완구시장은 나에게 매우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서울 종로구 창신1동, ‘동대문 문구 · 완구 거리‘는 동대문역 근처 청계천 골목에 자리한 1970년대부터 이어진 도매 거리다. 전국 문방구, 학원, 파티용품 가게들이 물건을 떼러 오며 성장했고, 지금은 유튜버, 소품 크리에이터,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연필, 공책, 색종이 같은 학용품부터 피규어, 블록, 보드게임, 파티용품, 미술 재료까지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여러 개를 한꺼번에 사면 도매가로 살 수 있어 알뜰 쇼핑이 가능하다.

단, 골목이 좁고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가게가 많아 현금 준비가 필요하고 주차도 어렵다. 동대문역,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도보 5~10분이면 닿아 대중교통 이용이 좋다. 구경만 해도 어릴 적 문방구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숨은 명소다.
동대문 문구 · 완구 거리 | 출처 서울신문



몇 달 전부터 창신동을 한번 다녀와야겠다는 이유가 생겼다. 딸아이 장난감을 사러 갔었던 추억은 당연하고, 내가 좋아하는 ‘혜화동 낙산 성곽’ 길에서 바라본, 저 건너의 창신동이 무척 당겼다. 성곽 사이를 두고, 두 개의 동네가 나란한데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오랜 세월을 두고, 한쪽은 적의 침략을 막던 곳이었고, 한쪽은 적이 쳐들어오던 곳이었다. 한쪽은 사대문 안쪽에서 세력의 문화를 누려왔던 곳이고, 한쪽은 벽 하나를 두고 고단한 삶을 이어오던 곳이다.


혜화동 성곽 안쪽에서 바라본 창신동의 집들이 낮고도 길게 깔려 있다. 나는 오늘 창신동으로 걷는다.




제일 먼저 창신동에 있는 ‘동대문 문구·완구 거리를 가보고 싶었다. 아이의 흔적과 세월의 때가 벗겨지지 않은 모습으로 그대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 딸보다 더 히히덕거리며 장난감을 들쳤던 기억들을 만나고 싶은 거지.


마포 대흥동 집에서부터 종로 동대문까지 걸어오는 데에 두 시간이 훌쩍 넘었다. 오전 8시에 출발한 것이 벌써 벌써 11시가 넘어간다. ‘흥인지문’ 돌들이 반짝인다. 반들반들한 성곽도 햇살에 얼굴을 씻는 아침이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시장에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흥인지문을 뒤로 돌아 ‘동문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수많은 신발들이 놓여 있는 걸 보니, 신발 도소매 시장인가 보다.


몇천 원짜리 신발부터, 조금 비싸다 싶으면 1~2만 원짜리 신발의 때깔이 서로 비슷하다. 진열장 유리창에는 ‘싸롱화’라고 씌어 있는 문구부터 남다르다. 그 아래로 휘양각색의 반짝반짝 빛나는 신발들이 ‘어서 나를 데려가라구’ 하며 한껏 뽐을 내고 있다.


저기 저것은 우리 할머니의 검정 털신인가 봤더니, 엄마의 신발이다. 쿠션 좋은 신발을 사다 드려도, 일 나가실 땐 꼭 신으시던 갈색 털북숭이 신발. 그것은 내 어릴 적 기억을 타고, 오랫동안 살아온 그녀의 삶이자 모든 어머니의 스테디셀러 아니었던가.



별로 없는 사람들을 헤집고, 조금 더 깊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수족관이 잔뜩 있는 것을 보니, 여기는 ‘관상어 시장’인가 보다. 사려는 사람도 없고, 팔려고 나온 사람도 없다. 한적한 시장 골목을 비어있는 수족관들이 자리를 잡고 휴가를 즐긴다.


여기저기 메마른 수족관 장비들이 마치 앙상한 녹각뿔 같다. 누군가의 주인이 구해지면, 저것들도 그의 집 어항에 들어가 울창한 숲이 되겠지?

꿈을 꾸는 그의 가지에 악수를 하고 돌아선다.


동문시장 골목 한 칸을 두고 청계천이 나온다. 계속 어두침침한 시장을 걸으려니 환한 공기가 필요했다. 시장을 나와 청계천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드디어 사람들이 많은 동묘역 앞 중고시장이 나타났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내가 찾던 완구들은 보이지 않았다. 마중 나와야 할 녀석들이 하나도 나타나질 않았다. 84 로봇태권브이도 없고, 그레이트 마징가제트도 없다. 이 녀석들! 겨울이라 추워서 안 나왔나 싶었고, 일요일이라 집에서 쉬고 있나 싶었다.


아이들이나 젊은 부부의 모습도 보이질 않았다. 잘못 왔구나 싶어 혼자 두런두런 입술을 삐죽였다. 그나마 저 앞에 완구 몇 점이 보이니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 그때 그 기억들의 현장은 ‘오월’이나 되어야 오나 보다.


슬렁슬렁 걷다가 동묘역 앞, ’동묘 벼룩 시장‘엘 접어

들었다. 이곳은 주로 중고품과 보세옷, 그리고 각종 고물들을 사고판다. 새 제품에 익숙한 젊은 사람들에게 이곳은 완벽한 보물섬이다. 정보에 익숙한 외국인 관광객들도 아침부터 분주하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물건들을 헤집고, 빛이 나는 보물을 찾는 경험은 새롭다. 내가 직접 사질 않아도, 옆에서 구경만 해도 즐겁다. ‘정상작동’이라고 씌어 있는 골판지 문구는 감성에 간절함을 더한다.


뭉텅이로 쌓여있는 낡은 디지털카메라를 보니 세월이 유수 같다. 저 카메라 하나를 사려고 용산전자상가를 수차례 다니던 기억들, 호구가 되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동묘역 앞에도 할머니 추억이 가득하다. 맨날 내 생일 때마다 양말 한 다스를 선물로 주셨었다. 선물은 필요 없다고 말은 했지만, 시장에서 사 주신 양말마저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돌아가신 할머니께 양말 한 켤레조차 사 드린 적이 없었다. 지나가다 멈추어 길에 쭈그려 앉아 양말 한 켤레를 샀다. 이제야 형체조차 없는 그 발을 붙잡고, 따뜻한 솜 양말 한 켤레를 신겨 드렸다. 마음에 할머니를 품고, 나는 길을 건너 창신2동으로 걸어간다.




창신동은 지역 특성상 ‘흥인지문’을 통해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채석장 산업으로 인하여 지금은 깎아지른 채석장을 병풍 삼아 마을을 이루게 되었단다. 그렇기에 저 반대편 멀리서 보면 절벽 위의 집들이 놓여있는 풍광은 서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다채로움이다.


창신동 오르는 길이 녹록지는 않다. 높지는 않지만 낮지 않은 골목이 좁고도 얽히고설켜 오래된 길들을 잇고 있다. 낡은 파란색 대문은 익숙하다. 그 옆으로 낮은 담벼락 위에서 포효하고 있은 ‘해태’ 동상은 오래되었지만 낯설다.


오르락내리락, 꼬불꼬불하며 좁은 골목을 품고 있는 ‘서울창신초등학교’를 보니, 이곳에서 뛰놀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이 상상이 된다. 얼마나 숨바꼭질을 많이 해댔을까? 땅바닥에 앉아 돌멩이로 수많은 그림을 그리고 지웠으리라. 이제는 다 잊힌 ‘골목대장’을 여전히 만들어내는 동네가 정겹다.


암벽을 한 움큼 앞마당으로 삼고 있는 ‘안양암‘ 절을 돌아, 막혔지만 걸어서 뻥 뚫린 하늘 고개로 올라간다.



창신2동 제일 꼭대기에 아주 넓은 놀이터 하나가 나왔다. ‘산마루 놀이터’, 이 동네 아이들이 제일 위에서도 낮은 세상이 부럽지 않게 뛰어놀 수 있도록 조성한 문화 공간이다. 놀이터 모양새가 ‘골무’를 닮았는데, 봉제산업의 메카인 창신동의 지역적 의미를 살렸다고 한다.


놀이공간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면 벌집 모양으로 생긴 정글짐 아래로 서울이 한 바닥 내려다 보인다. 360도 휘둘러 풍경이 아주 괜찮다. 창신동의 하늘을 눈에 담고 다시 내려와 마지막 고개를 오른다. 저 위에 길게 뻗은 낙타 한 마리가 우뚝 서 있는 게 보였다.



와우! 놀라운 건물인데? 카페인가?

뜨거운 1월의 태양을 등에 업고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올라갔다. 저 아래 멀리서 보이던 낙타 한 마리는 신식 건물로 만들어진 창신동 최대 높이의 카페다. 이름도 ‘낙타카페’라고 씌어 있다.


카페로 들어가는 방법이 엘리베이터 하나만 보인다. 버튼을 눌러 2층으로 올라가니, 기다란 카페 안에 갤러리로 가득하다. 그리고 옆으로 통창이 창신동 전체를 조망하고 있다. 저 건너의 채석장 절벽도 어느 수묵화에 나오는 금강산으로 보인다.


따듯한 카페모카 한 잔을 주문하고 물끄러미 창밖의 창신동을 내려다본다. 푸른 하늘아래 모든 갈대 나무와 집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다시 밖으로 나와 둥근 계단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차가운 바람이 따듯한 햇살을 담고 손과 발을 휘감는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차가움을 잊고 한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생각지 못한 창신동의 매력이 눈물겹다.



혜화동 낙산 성곽 반대편에서 바라볼 때에는 그저 낮게만 보였던 창신동이었는데…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하늘 아래 옥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마을이다. 그리고 저 건너편 채석장 절벽도 서울의 금강산처럼 아름다웠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기도 건너가 볼까?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 멀지 않다고 내 호기심이 나를 당겼다.


카페를 내려와 다시 좁은 골목길을 타고 내려간다. 해는 중천을 넘어 서해에 닿고 있었다. 창신동을 내려가는 걸음은 다시 오르막을 탄다. 낙산교회를 도니 넓은 아스팔트길이 숭인동으로 이어졌다.




저기 창신동에서 보이던 채석장 절벽 위에는 ‘숭인근린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안내판을 보니, 이곳은 숭인동의 동망산에 위치해 ‘동망산 공원’이라고도 한다. 동망산의 봉우리는 ‘동망봉’이라 부르는데, 조선 6대 왕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동망봉은 조선 단종의 비(妃) 정순왕후의 비통한 사랑이 서린 곳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된 뒤, 정순왕후는 이곳 봉우리에 올라 매일 영월을 향해 남편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졌다. 그 아픈 사연이 전해져 내려오며, 동망봉은 서울 속의 작은 역사적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겨울 찬 바람이 봉우리에 죄다 모인 듯했다. 운동하는 어르신들 몇 분이 등을 탁탁거리며 손을 비벼댄다. 어쩜 산책하러 나온 강아지도 없다. 멋들어진 정자는 홀로 겨울을 난다. 동묘역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 다시 창신동을 지나간다. 마지막 남은 노인 한 분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제 갈 길을 간다.



- 제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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