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314.77km, 오늘: 14.92km, 걸음 수: 18,161
표지사진 | 서울 강서구 방화1동 ‘자전거 동행’
그 동네, 비행기 말고 뭐 볼 데나 있을까?
이번 주는 ‘화곡동’을 걷는다고 하니, 친구가 툭 한마디 던진다. 모처럼 저녁을 함께 먹으며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걷는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얼마나 걸었는지, 기록이 어떻게 쌓였는지를 말했더니, 친구는 화들짝 놀란다.
“ 뭐? 하루에 100km? 말이 되냐? 그걸 어떻게 걸어? “
나는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었다.
“ 껌이지. 하하. “
사실, 껌은 아니었다. 말로는 100km지만, 1년 전 그날은 내 인생 최고의 고통이었다. 100km는 단지 결과였을 뿐, 그때 내 목표는 ‘24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고 걷기’였다. 그리고 정확히 그날, 나는 102.2km를 기록했다.
친구는 아직도 걷느냐고 물었고, 나는 요즘 서울 동네를 샅샅이 걷는다고 답했다. 올해 목표한 숫자에 거의 닿았고, 이제 남은 여남은 동네 중 하나가 ‘화곡동’이라고 하니, 친구는 거기에 뭐 볼 게 있냐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그랬다. 화곡동은 그저 김포공항과 맞닿아, 비행기가 뜨고 지는 옆 마을일 뿐이었다. 무슨 유명한 랜드마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 각인된 화곡동의 이미지는 어릴 적부터 ‘비행기 소리가 하루 종일 들리는 동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비행기 소리 때문에 주민들 세금을 깎아준다며? 와~ 돈 벌겠네.” 화곡동에 살던 후배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는지 아닌지는 이제 기억조차 없다. 벌써 30년 전, 철없던 시절이었다. 뜨거운 여름, 매미 소리보다 비행기 소리가 더 클까? 그렇게 오늘 나는 화곡동으로 향했다.
화곡동으로 곧장 가지 않고, 먼저 방화동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 근처 ‘개화산’을 다시 한번 오르고 싶었다. 올겨울 처음 가입을 하고 참석했었던 민간인 걷기 동호회에서 올라갔던 산이다. 원래는 ‘강화도 걷기 여행’이었지만, 당일 버스가 운행 시간을 펑크 내는 바람에 급하게 변경된 코스였다. 산은 낮았고, 무엇보다도 ‘김포공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지하철 5호선 마포역에서 개화산역까지는 30분 남짓 걸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개화산역 입구로 나오자, 온 세상의 열기가 내 머리 위에만 내려앉은 듯했다. ‘뜨겁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을 사 들고 개화산으로 걸었다. 길 위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드물었다. 방화동에 불을 지른 것만 같았다.
한번 와 봤던 길이어서인지, 개화산 가는 길이 그닥 낯설지는 않았다. 산 정상까지 20분이면 닿고, 중간 즈음에 ‘김포공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까지도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전망대에 이르니 역시나 한눈에 쨍하게 들어오는 경치가 끝내준다. 김포공항은 이제 동네 편의점처럼 느껴진다. 인천공항이 이마트라면, 김포공항은 GS25 쯤 된다. 멀리서 보니 학교 운동장 같다.
개화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돌고 방화동으로 내려왔다. 여기서 화곡동까지는 대략 6~7km 남짓 걸린다. 평소라면 아무것도 아닐 거리였지만, 그늘도 별로 없는 길을 통해 걷다 보니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혀왔다. 방화동도 화곡동 못지않다. 비행기장 근처라 고층 건물은 별로 보이지를 않는다. 방화동과 화곡동은 오늘같이 뜨거운 날에 딱 맞는 이름들이다. ‘누군가 불을 질렀고, 열기 때문에 곡 소리가 나는구나!’ 혼자 키득거리며 걷는데, 저 앞으로 재래시장이 보였다. ‘방신전통시장’? 이름도 희한하다. 발음을 잘해야겠다. 너무 더워서 판단할 겨를도 없이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메~ 복잡한 것!’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더 덥다.
방신전통시장은 강서구 방화동과 신방화동 사이, 옛날부터 장터가 서던 길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름 또한 두 동네의 머릿글자를 따 ‘방신’이라 불리게 되었고, 주민들의 생활을 지탱해 온 작은 상권에서 출발했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 포목점과 상점이 모여들며 장터의 기틀이 잡혔고, 이후 근대와 함께 재래시장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지금은 120여 개 점포가 이어가는 골목형 시장이 되었지만, ‘방신’이라는 이름에는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방화동을 지나 마곡동으로 접어들었다. 생각해 보니 화곡동은 어쩌면 강서구의 강남에 가까웠다. 강서구의 제일 끝이라 생각했었는데, 목동에 딱 붙어 있네? 마곡동이 방화동과 화곡동 사이에 있는 동네라는 것도 걷다 보니 알게 되었다. 현재는 LG그룹 등, 대기업들이 모여있는 ‘마곡 R&D센터’ 덕에 신흥 주거 업무 지역으로 급부상했지만, 나는 그 이전까지는 마곡동을 잘 알지 못했다.
마곡동에 들어서니 도로가 넓어지고 환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의 아파트는 전부 새로 지어져서, 햇빛에 더욱 빛이 나고 있었다. 고도 제한 때문인지 건물은 높지 않았고, 오히려 녹지가 풍성해서 용적률만 높은 고층 아파트단지보다 훨씬 풍요로워 보였다. 아파트를 지나 R&D연구 단지로 들어섰다. 주말이라 한산하다. 바람조차 없다. 통상 건물과 건물 사이는 바람이 몰아쳐 꽤나 시원할 법도 하지만, 나뭇잎조차 흔들림이 없다.
개화산 정상까지 올랐다가 방화동을 돌아 마곡동까지 오는 길, 벌써 지쳐버렸다. 물 한 병도 오래전에 다 마셔버렸고, 주변에 편의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말끔하고 보도블록은 새로 깔려 있었지만, 수분기 없는 사막처럼 아지랑이만 솔솔 피어오른다. 잠시 쉬어갈까 싶어 어느 연구동 앞 벤치에 앉았다가 이내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솥단지처럼 뜨겁다. ‘너마저…’
허리를 숙여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그냥 쉬기보다는 화곡동까지 남은 3km 남짓을 그냥 걸어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신발끈을 바짝 조일수록 걷기가 편하다. 지긋이 눌린 발목 위 신발끈은, 느슨한 근육을 단단히 묶어 힘을 전달한다. 나름 오랜 걷기 끝에 얻은 깨달음이다. 저 앞에는 노년의 부부가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 폭염을 느긋한 걸음으로 견뎌내는 모습이, 그 자체로 인생의 지혜처럼 보였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화곡동에 도착했다. 먼저 마주친 곳은 ‘우장산’이다. 우장산은 양천구 화곡동과 가양동 사이에 자리한 해발 100m 남짓의 야산으로, 조선시대 궁중에서 기르던 말을 방목하던 목장(牛場)에서 이름이 비롯되었다. 그 아래로 낮은 주택들이 줄을 섰다. 나무로 뒤덮인 주택 하나는 턱수염을 자랑한다. 덥겠다 했더니 그늘지어 좋다고 웃는다. 청명한 하늘 그 아래 구름도, 그의 턱수염으로 화곡동 시장 입구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화곡동을 걸으며 특별히 눈길을 잡아끄는 볼거리는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평지 같다가도 어느새 고개를 오르는 듯, 발걸음은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골목마다 하늘에 빼곡한 전선은 화곡동의 풍경이자, 이곳 삶의 생명줄처럼 얽혀 있었다. 예전 같으면 귓가를 울렸을 비행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날아가는지도 모르게, 하늘은 그저 잠잠했다. 햇살만이 묵묵히 내려앉아 걸음을 데우고, 땀을 굳혀 작은 소금 자국으로 남긴다. 그렇게 화곡동은, 요란한 풍경 대신 일상의 숨결로만 존재하는 동네였다.
화곡동을 걷다 보면, 흙길 속에 오래전 들판의 그림자가 겹쳐진다. 조선시대 양천현에 속했던 작은 마을, 불과 곡식이 만나는 비옥한 땅은 한강과 계양천을 따라 삶을 키워냈다. 그 들판 위에 도시가 번져 오르던 1970~80년대, 농부의 괭이 소리는 곧 건설의 굉음으로 바뀌었고, 논두렁은 주택지의 골목으로 잦아들었다. 김포공항과 가까운 이곳은 늘 하늘길의 굉음을 품었고, 비행기 소리는 삶의 소란이자 배경음처럼 스며들었다. 오늘의 화곡동은 들판과 활주로, 농부와 도시인의 발자취가 뒤엉킨 자리.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겪어온 변화를 압축해 보여주는 작은 풍경이 된다.
화곡초등학교와 화곡동성당을 들렀다. 누군가의 모교이자 가족을 위해 기도 하던 곳을 나의 눈과 사진에 담는다. 나의 기록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혼잣말을 내뱉는다.
아직 태양은 질 줄 모른다. 돌아가는 길이라도 조금 선선했으면 하는 바람은 욕심일까. 화곡동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랐다.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나는 화곡의 가장 높은 곳에서 화곡을 담고 이제 집으로 간다.
- 제27화 끝